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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그뿐 나쁜 버릇이 도졌다. 공연한 생각으로 또 못난 면을 드러낼 뻔했다. 이따금 남, 혹은 나와는 크게 관계 없는 상황에 천착할 때가 있는데, 괜한 마음으로 산란한 시간을 맞고 후회하는 건 결국 다 내 몫이었다. 그토록 스스로를 고질적으로 괴롭혀 온 버릇이건만, 지친 심신으로 느슨해진 경계를 뚫고 못난 것들이 또 불쑥 고개를 내민 하루였다. 그럴 수 있다. 그런 날도 있다. 단지 그뿐이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나를 챙기신 마음들에 더 집중할 일이다. 고작 두어 번 불린 타인보다 두어 시간 새 몇 번이나 불린 내 이름에 담긴 애정에 더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무심한 듯한 말투 뒤로 얇게 펴발린 걱정과, 차마 모로도 볼 수 없었던 미안함과, 복잡한 마음들을 딛고 기울인 나름의 배려에 눈을 돌릴 일이다. 오로지 .. 2019. 4. 6.
행복을 비는 마음이란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문장을 쓰며 새삼 생각해보았다.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나는 어떤 때 주로 해 왔던지. 못내 아쉽거나 더없이 슬프거나, 여하튼 감정에 제법 습기가 들어찬 때 나는 누군가의 행복을 빌곤 했다. 내 행복을 비는 말들을 며칠에 한 번 꼴로 마주한 날들이 있었다. 이 산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한 길의 문턱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던 시간들이었다. 심장을 졸이며 통지를 기다리던 때, ‘합격’이란 말 대신 만나는 ‘행복’에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글자들은 자욱을 남길 새도 없이 눈 앞에서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대개는 울면서, 때로는 분노하면서 그 문장을 움켜쥐었다. 문장 사이사이를 마치 숨통이라도 된 마냥 틀어쥐면서 그 말들의 진정성을 속으로 몇 번이나 의심하곤 했다... 2019. 3. 25.
복 많은 사람 평생 잃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 내게 머물러 주었으면 했던 무언가가 또 훅 빠져나가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텅 빈 마음 위에 자꾸만 겹치는 감사한 것들이 많아 또 울어버렸다. 이렇게나 부족한데도 이만치나 보듬어주시는 분들이 많다. 잃지 말아야지. 정말로 잊지 말아야지. 지킬 것들을 위해서라도 사랑해야지. 필사적으로 사랑해내고야 말아야지. 그러고 보니 내가 참 복이 많다. 내 인생에 깃든 이 아름다운 사랑들을 되새기며 나의 복됨을 깨닫는 하루. 너무 감사해서 계속 울게 되는 하루가 또 간다. 2019. 3. 14.
이런 하루 말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운 하루고, 말의 이전에 불쑥 나와버리는 눈물이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하루고, 나약해 빠진 마음이 때리고 싶을 만큼 싫어지는 하루고, 쏟아지는 말들을 감싸고 막아주시는 소중한 말들에 제대로 감사도 전하지 못하는 자신에 화가 나는 하루고, 그것 하나 막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에 - 이 모든 것들에 터덜터덜 걸으면서도 자꾸만 울게 되는 하루가 간다. 2019. 3. 8.
빵 헤는 밤 빵순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더디다. 확 느껴진다. 시간의 유속에 둔감한 편인 내가 시간을 가장 강렬히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와 같은 빵 파티가 힘들어졌다는 것, 주말 내내 느긋하게 빵을 뜯어먹던 식습관과 강제로 이별하게 됐다는 것, 점심께 먹은 빵 때문에 다음날 아침까지 속이 더부룩한 날도 간혹 있다는 것... 아, 이렇게 근 10여 년을 이어온 나의 빵순 인생이 내게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다. 나는 발칙하게도 별 헤는 밤마냥 김영모며 나눔과베품이며 도쿄빵야며 이흥용이며 프레제며 옵스며 하던 빵집 이름들을 마음밭에 하나하나 새기다가 지워버린다. 김영모과자점에선 개당 8천원씩이나 하는 빼빼로를 샀었다. 오빠는 그 작은 것이 그만치나 비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 2019. 2. 16.
일단 뜨겁게 청소는 했는데 새해라기엔 어딘지 겸연쩍은 새해맞이 방 청소를 했다. 다른 데보단 책장이 정리대상 1순위였다. 이사 온 후 책들이 더 쌓여 감당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책더미가 바닥까지 침투했을 즈음에야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3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정리는 정확히 2배인 6시간을 들이고서도 끝이 날 줄을 몰랐다. 모든 청소가 그렇듯 책장으로 시작된 청소는 방 전체 단위로 커졌고, 방은 반나절을 꼬박 바친 뒤에야 최소한의 애정을 줄 법하겠다 싶은 공간으로 거듭났다. 어제까진 방 상태가 마구간 수준을 면치 못했다는 뜻이다. 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이나 공간만 차지하던 시리즈물을 큰 맘 먹고 빼냈다. 내놓은 것들 중엔 산 지 얼마 안 된 책도 있고 더 괜찮은 번역본을 구해 자리만 차지하게 된 중역본도 있으며 .. 2019. 2. 5.
하늘로 날아간 보라색 나비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건 지난달 말이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고, 최전선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여생을 바치며 사셨다. 당시 일본군이 어린 소녀들에 자행한 행위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자, 그들의 잔혹함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가 닿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쟁 피해 여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응원을 보태셨고, 당신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나라에 2011년 대지진이 발생하자 그 누구보다 먼저 구호금을 보내신 대인이었다. 나는 먼 발치에서나마 할머니를 뵌 일이 있었다. 정대협에서 주최하는 수요집회에서였다. 20대의 나는 복수전공생이니 어찌 됐든 절반은 역사학도라는 의무감과 함께, 같은 여성으로서 겪.. 2019.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