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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순간

하늘로 날아간 보라색 나비

by 디어샬럿 2019. 2. 2.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건 지난달 말이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고, 최전선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여생을 바치며 사셨다. 당시 일본군이 어린 소녀들에 자행한 행위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자, 그들의 잔혹함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가 닿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쟁 피해 여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응원을 보태셨고, 당신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나라에 2011년 대지진이 발생하자 그 누구보다 먼저 구호금을 보내신 대인이었다. 나는 먼 발치에서나마 할머니를 뵌 일이 있었다. 정대협에서 주최하는 수요집회에서였다.

20대의 나는 복수전공생이니 어찌 됐든 절반은 역사학도라는 의무감과 함께, 같은 여성으로서 겪은 아픔에 대한 부채의식과 같은 감정을 안고 수요집회에 몇 차례 참석했다. 할머니는 항상 집회에 나오셨다. 여름엔 모시삼베 옷을 입으셨고, 겨울엔 모자에 담요에 온몸을 꽁꽁 싸매면서도 그 현장의 가장 앞자리에 계셨다. 실물로 뵌 할머니는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작고 말라 보였다. 평화운동가라는 이름의 옷이 있다면 분명 할머니께는 한참이나 품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왜소한 체구였다. 저렇게 작은 한 명의 여성이자 개인이 그토록 거대한 전쟁의 참상과 싸워내고 계시다니...

기억을 돌이킨다는 건 그때의 상처도 함께 헤집는다는 뜻이기에 나는 할머니의 작은 몸을 본 순간 조금 아득해졌다. TV에서 몇 번이고 그때의 기억을 이르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저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려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과 겹쳤다가 분리됐다 했다. 미디어에서 일본군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증언하고 평화를 말씀하시던 할머니는 정말로 ‘큰 사람’ 같았는데, 작은 무대 위에 오르신 할머니는 그저 우리와 일상을 공유하는 그 나이대 할머님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그 간극에 잠깐 혼란스러웠다. 저 작은 할머니를 기억의 습격에 견디고 상처를 뛰어넘어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지 그 찰나에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일본의 사과나 우리 국민들의 공감 같은 것들일까. 그리고 할머니께서 말씀을 시작하셨을 때, 나는 깨달았다. 오직 할머니의 안에서 나온 인력이 그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감당하게 했다고. 할머니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다. 할머니의 언어는 치졸하고 비정상적이며 역겹기까지 한 시도들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했다. 시대와 체제가 자행한 지극히도 비인간적인 가학의 기억에도 할머니는 숨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언어와 몸짓과 모든 것이, 당당했고, 떳떳했다. 내가 수요집회에서 뵀을 때 이미 할머니는 여든을 몇 해나 넘기신 후였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꼿꼿이 등을 세워 일본대사관을 향해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과거를 인정하라, 사죄하고 인정하라...

몇 번 가지 못한 것이나마 수요집회에서 할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김복동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그 외에도 얼굴이 눈에 익은 할머니들... 당시엔 스무 살도 채 안 된 소녀들이었고, 6-70년의 세월을 건너와 여든 살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은 그때도 당시도 지금도 우리 곁의 여성이자 개인이었다. 할머니인들 어찌 두렵지 않으셨으랴. 수많은 이들 앞에서 그때의 아픔을 다시 꺼내고, 이따금 상처를 후벼파는 사람들에 맞서야 할 땐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남몰래 흘리셨을까. 그럼에도 꿋꿋이 사죄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의 용기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수요집회에 다녀온 날은 밤 늦게까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찾아서 보았다. 내 안의 할머니들은 그렇게, 잘못된 시대에 맞서고 상처를 드러내며 연대를 이야기하는 진정 ‘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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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내려온 후 수요집회에 가지 못하면서 정대협 홈페이지나 미디어를 통해서나마 할머니들의 소식을 접했다. 부산 생활을 시작한 그해, 그때의 정부가 할머니들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했다는 소식이 각종 미디어를 타고 전해졌다. 배상금이라고 10억을 받았다며 멋대로 재단을 세우고 이제 이 문제는 해결됐다고 그네들은 말했다. 나는 그 정부의 무지와 독단에도 화가 났지만, 해결책이랍시고 합의를 지시했을 당시 수장의 공감력 부재에 무엇보다 이가 갈렸다. 저 이가 단 한 번이라도 뉴스에서 할머니의 증언을 보고 들은 일이 있다면 차마 그렇게 할 생각은 하질 못했을 터다. 애초에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에 가능한 행보였고, 그건 전쟁의 가장 추악하고 기괴한 형태의 피해자였던 이 여성들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 내지는 무시가 기저에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가 없는 발상이었다. 생물학적 여성인 당시 대통령에게는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전쟁의 최전선까지 내몰려야 했던 할머니들이 그저 배상금만 쥐어주면 곧 떨어져 나갈 ‘성가신 혹’ 정도일 뿐이었을까.

이듬해에는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이 출간됐다. 나는 그 책을 몇 장 펼치다가도 몇 번이고 덮었다. 할머니의 증언을 거의 각색하지 않은, 날것이나 마찬가지인 소설 속 경험들은 너무 잔혹하고 처참해서 웬만한 마음으론 계속 읽는 게 힘들었다. 나는 며칠, 길게는 몇 주 간격으로 그 책을 다시 시도했지만 이내 얼마 못 읽고 책에서 눈길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러다 그해가 다 가기 전, 숨을 들이키고 참다가 눈길을 다른 것에 주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반나절 간 책을 다 읽었다. 책 말미에 이르러서야 ‘필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소설 속 화자는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동네 강가에서 다슬기를 줍다 만주까지 끌려간다. 필동 할머니는 7년간 일본군의 전선을 따라다니며 성노예 생활을 했고, 일본이 패망한 줄도 모르고 위안소에서 도망쳐 조국으로 온 후에도 5년을 더 헤맨 뒤에야 가까스로 고향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녀를 비롯해 살아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가족에게 버림 받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활자로 읽는 것조차 끔찍하고 몸이 떨리는 위안소 생활 이상으로 나를 울게 한 건 조국에 돌아온 후 그녀들의 삶이었다. 엄마를 그리며 이 악 물고 위안소 생활을 버텨낸 열세 살이었던 소녀. 그녀가 긴 시간을 돌아 고향땅에 닿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형제들은 그녀를 성가신 존재로 여겼고,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돼 버린 데다 그녀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죄책감과 사람을 향한 강한 거부감이 그녀들을 철저히 고립되게 했다. 사회 역시 그녀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의 절대 다수가 평생 그 시절의 상처를 감추며 홀로 살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무려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무려 반 백 년을 숨 죽여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다. 최초의 증언 이후 그나마 한두 명씩 “나도 피해자”였다는 증인들이 나왔고, 전쟁 피해 여성으로서의 할머니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한 명> 속 주인공처럼 여전히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있는 피해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분들이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도 받지 못한 채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떠나고 계시단 걸 생각하면 내 일이 아님에도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가 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 간 여성은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살아 돌아온 여성은 2만 명이라 한다. 열 명 중 단 한 명만이 살아 남아 조국에 돌아온 셈이다. 1991년 이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는 고작 238명이며, 오늘을 기준으로 생존자는 단 23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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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을 먹다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할머니는 수요집회에서 뵀던 당당하면서도 고운 미소로 영정 속에서 웃고 계셨다. 화면 속에 비친 장례식장엔 많은 시민들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었다. 저 분들이야말로 할머니의 가족이구나, 할머니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할머니의 용기가 이렇게나 큰 사랑을 불러온 것에, 나는 밥을 먹다가 그만 또 목이 막히고 말았다. 할머니를 추억하고 추모하는 많은 이들의 손마다 보라색 종이 나비가 들려 있었다. 나비들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현지에서 하얀 입김들과 함께 작은 날개를 팔랑였다. 저 보라색 나비들이 하늘로 올라가 할머니의 못다 이룬 꿈에 닿기를... 나는 작은 소녀이자 여자였고 인간이었던, 그러나 누구보다도 평화를 바란 운동가이자 큰 사람이었던 할머니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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