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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감사14

기록해야만 하는 감사를 위해 새해가 밝자마자 분주했다. 이 일을 하고서부터 쭉 그랬으니 어느덧 만 3년째다. 올해는 더 그랬던 것 같다. 또 한 번 중요한 순간에 마주한 헤어짐과 만남에 휩쓸릴 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버텨냈다, 는 말이 적절한 조금의 날들을 보냈다. 그리고서 시작된 날들. 세 번을 해 왔지만 여전히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그 날들을 보냈다. 어제로 77일째였다. 사람 때문이라는 말 외에는 더 형언할 길이 없는 날들이었다. 어떤 한계 앞에선 부끄러워 숨어버리고만 싶고, 더없이 실망스러운 순간들로 소비되는 나의 밤들엔 때로 정말 울고 싶었다. 욕심 탓이라면 탓일까.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뜯어고치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마감일 3주 전부터는 이틀에 한 번.. 2023. 3. 19.
비가 내게 알려준 것 출근길에 막내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막내가 늦깎이 군인이 돼 입소한 지도 2주가 훌쩍 지났다. 내 또래들이 복무할 때만 해도 위문편지란 손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국방부 앱의 메뉴로 들어가 글을 쓰면, (아마도) 분대장이 그걸 출력해서 병사들에게 전달하는 식인 것 같다. '등록' 버튼을 누르면 '접수완료' 배너가 붙고, '출력완료' 배너가 뜨면 편지가 병사에게 갈 준비가 됐단 뜻이다. 세상이 정말로 좋아졌구나, 생각하는데 '캠프가족'들 말로는 그래도 종이편지는 또 보내줘야 한단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집에서 온 편지를 소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읽어주는 문화가 있긴 한가 싶지만, 내 경험의 지평에 없는 영역이다 보니 상상에 그치고 만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 2020. 11. 19.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그 '작품'은 거대 우주망원경에 비친 가장 아름다운 우주를 43분간 압축한 화보집과도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제목을 마주한 이라면 누구나 예상 가능할 법했을 터다. 한때 소년형 미남의 상징이었으며 이제는 연기파 배우 반열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헐리웃 배우의 내레이션을 앞세운 홍보문구보다, 오직 '3D우주'라는 글자가 내 눈에 박혔다. 심지어 아이맥스라는 타이틀까지 붙어, 나는 이 다큐 하나를 위해 잠에 절은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며 기어이 맥북 프로를 켜고야 말았다. 불 꺼진 방의 어둠에 덧대어 점점이 재생되는 우주는 정말이지 -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원래 우주를 좋아하지만, 어젯밤의 우주는 좀 더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시간마저 무력.. 2020. 11. 17.
누적분 감사 https://youtu.be/Wn9E5i7l-EgPet Shop Boys, 내려놓으니 보이는 것이 있다. 물러서니 도드라지는 것이 있다. 어젯밤 문득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애꿎은 화살의 표적이 됐던 애먼 마음이 보였다. 나와 양감과 질감이 다른 시간을 건너고 있는 그에게, 나는 오직 나의 시공으로 바라보며 군마음을 먹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악 물고 간신히 견딘 시간이 있는데도, 나는 불과 몇 달 만에 정반대의 입장이 되어 활을 겨누고 있었다. 어젯밤 막차를 타는데 문득 떠올랐다. 이 시간은 어쩌면 그간 제대로 느끼지 못한 모든 감사한 것들을 오롯이 받아들이기 위해 주어진 순간이 아닐까 하고. 느닷없이 튀어오르는 맥박을 심호흡으로 잠재우며, 밤과 아침을 오가며 생각한다. 남은 시간만이라도 제.. 2020.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