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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about R4

어느 날 라디오가 내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당연했던 걸까. 간신히 버틴 하루가 어깨 위로 가차없이 무너져내리는 일상의 끝. 견고히 두른 무심함 사이로 순간순간 날을 들이미는 울화와 설움을 꾹꾹 참으며 라디오를 켰다. 배캠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한때는 내 나날의 끝을 알리던 프로그램이었다. 그게 벌써 십육칠년 전 이야기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건 아마도 작년 말.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배캠에선, 김영하 작가의 약간 더 결이 곱고 조금은 더 가벼우며 미지근한 속도감이 단어마다 뒤따르는 특유의 목소리가 배철수 아저씨의 느긋한 음성을 대신하고 있다. 철수 아저씨의 휴가를 메우기 위한 스페셜 DJ가 됐다며, 페이스북 페이지에 남긴 그의 글을 본 기억이 났다. 문득 털어놓고 싶었다. 무장해제 상태로 튀어오르려는 감정의 생니들이 혹여나 잇자욱을.. 2019. 8. 16.
Heal the days 연남동 생활 이틀째다. 한층 다양해진 채널 덕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넘실대는 작은 라디오를 켜는 게 하루의 시작이 된 일상. 오늘 아침의 선택지는 전현무였다. 위트로 중무장한, 의외로 냉철한 음성이 빠른 템포로 흘러나온다. 샤워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힐 더 월드를 듣다, "김종국 씨가 팝송도 잘 부르네요" 라는 청취자 문자에 너무해~ 혼잣말하며 눈을 살짝 흘기고 웃었다. 공덕동에 있는 마트에 들러 토마토와 현미 등 이것저것 샀다. 매장이 생각보다 좁고 물건이 생각보다 없었다. 별 거 없는데도 종량제 봉투를 가득 채운 장거리들을 낑낑 들며 버스에 올라타, 다음번엔 합정동 쪽에 있는 마트엘 들러봐야겠다 생각했다. 알고 보니 공덕동보단 합정동이 이쪽서 훨씬 가까웠다는 건 방에 돌아와서야 안 사실. 참 이 .. 2014. 12. 11.
심야 라디오의 여남은 시간 면접 이후부턴 온종일 라디오다. 아침 8시께부터 저녁 8시까지는 으레 틀어놓으니 정확히 반나절이다. 대개 전현무나 당아박으로 시작해 9시가 되면 김동규 아저씨나 김창완 아저씨 목소리를 듣다 11시발 씨네타운으로 오전 시간을 보낸다. 점심을 먹으며 최파타나 임백천 아저씨 라디오를 듣고, 2시 즈음이면 한동준 아저씨표 FM POPS로 어깨를 덩실덩실. 왕영은 언니(라 부르고 싶다, 이분은 왠지)나 오발로 오후를 나다가, 해질 즈음이면 저녁을 먹으며 어김없이 배캠을 듣는다. 철수삼촌의 끝인사 무렵 가족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라디오와 함께 한 하루도 저문다. 다들 좀 늦거나 혼자 있게 되면 음악공감이나 클래식 FM, 꿈음 정도 듣는 것 같다. 밤에 라디오를 듣는 일은 많지 않다. 타고난 올빼미족은 아니라 심야 라.. 2014. 12. 5.
어느 저녁 오랜만에 맞은 평범한 저녁이다. 오후께 산 가자미를 다듬어 미역국을 끓이고, 부추를 한 단 사다 국간장과 멸치액젓에 고춧가루 팍팍 뿌려 무쳤다. 간하지 않고 삶은 검은콩에 브로콜리와 양배추 그리고 생굴까지 내니 고기 하나 없이도 멀끔한 저녁 한 상 태가 난다. 풀밭 바다밭이지만 단촐하고 깔끔해 좋다. 으레 겪었던 속 더부룩함도 없다. 가공식품과 밀가루, 커피와 초콜릿 없인 못 살던 인생을 청산하고자 마음 먹은 지가 나흘 정도 됐다. 매일 아침을 열던 커피우유도, 배가 불러도 때깔에 눈이 돌아가곤 했던 빵도 완전히 끊은 지 아직은 불과 사흘째. 다이어트에 목매달며 끊자 싶을 땐 그렇게도 생각나더니, 목전에 건강을 두니 안 먹어도 이렇게나 살 만하다. 미각의 순간이란 이토록 찰나인 것을. 그 잠깐에의 탐닉에.. 2014.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