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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6

비극 한가운데, 비극 : <시학>, 셰익스피어 그리고 <모비 딕> 대학교 2학년 때 연극학과 수업을 들었다. 자유전공이었다. '서양고대연극사'라는 과목이었고, 학기 내내 아리스토텔레스의 을 읽는 커리큘럼으로 진행됐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학교 연극학과는 연기 전공과 연출 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업은 거의가 연출 전공 쪽 학생들이었다. 나와 내 친구는 (확실히)전무(아마도)후무한 타과생이었다. 교수님은 여러 학교로 출강을 다니시는 다소 젊은 분이셨다. 양 볼이 꺼지고 턱이 조금 내려온 얼굴의 위에 붙은 형형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말씀이 많은 분이셨음에도, 말 많은 사람들의 흔한 단점이자 약점인 쓸데 없는 말만은 신기하게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범람하듯 터지는 그 많은 말 모두에 고밀도의 지식이 걸쭉히 들어차 있었다. 언어 하나하나.. 2017. 2. 13.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ㅡ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p.34) ㅡ 같은 곳에서의 세 번째 면접.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본인은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후련함과 상실감 사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달래려 집어든 책에서 저 문장과 맞닥뜨렸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헤밍웨이의 문장은 짧고 단단하다. 한 치.. 2016. 8. 22.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연(緣) ​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피천득 작가는 인연을 이른 적이 있다. 사람 사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경험, 장소, 심지어는 문장 몇 줄에까지도 '아니 만나는' 편이 어쩌면 더 좋았을 연이란 게 있다. 안타깝게도 이, 내게는 그런 소설이 돼 버렸다. 열여덟 즈음이었나. 를 처음 읽었다. 쉴 틈도 없이 한 권을 내리 달렸다. 전율이랄까 충격이랄까. 이런 책이 다 있구나 싶었다. 간단히 이르자면, 60년대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을 6살배기 루이즈 진 핀치의 짓궂지만 더없이 순수한 눈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너무 무겁지 않고도, 외려 그렇기에 흑백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비춰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백인 동네의 멸시를 이겨내고 자신만의 정의를 지켜가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 2016. 8. 22.
<소리와 분노>, 윌리엄 포크너 -- 진열창 안에는 시계가 열두어 개 있었는데, 그 열두어 개의 시간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시곗바늘이 없는 내 시계처럼 저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양립하지 않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서로 틀리다고 반박했다. (p.113) -- 시계는 시간을 죽인다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작은 톱니바퀴들에 의해 째깍째깍 기록되는 한 시간은 죽은 것이며, 시계가 멈출 때에야 비로소 시간이 살아난다고 했다. (p.113) -- 다시. 존재의 과거형보다 슬픈 말. 다시. 무엇보다 슬픈 말. 다시. (p.128) -- 고향에서 팔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이런 날들이 있다. 이렇게 산소가 희박하고 열망으로 가득한 날들이, 서글프고 향수 어린 친숙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날들이. 아버지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는 기후의 총합이라고 .. 2015.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