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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3

<전쟁과 악기>, 이청준 ― 무엇보다 먼저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어떤 음을 가리켜 우리들이 ‘도’니 ‘레’니 하는 음칭들은 애초에 그 음들이 독립적으로 지니고 있는 절대적 음가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옥타브 내의 모든 음위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 아니라 다른 음위와의 음차 관계로서 상대적으로 존재한다(※=음계와 계명). 우리들은 다만 우리가 익숙한 음차에 따라 약속된(심지어 음명까지도 우리들의 약속에 불과하다) 음차의 질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음차 질서 가운데서 어느 한 음위를 말살한다면 그와 이웃한 다른 음위의 개념도 함께 상실 당하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이미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음차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음차의 약속이 연쇄적으로 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하나의 악기를 예로 하여 생각해보자... 2015. 7. 19.
<목포행>, 이청준 언젠가 한 친구와 술이 몹시 취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친구 주정 삼아 저더러 왜 요즘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시빌 걸어오더군요. 전 그저 평소 느낌대로 글이 잘 씌어지지 않아 그런다 했더니, 그 친구 대뜸 저더러 그새 겉늙은이가 다 됐다고, 겉늙은이처럼 고고한 소리 말라고 다시 시비예요. 공연히 세상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개인의 삶인데 쓸데없이 너무 세상사에 휩쓸려 같잖은 소명감이나 비분강개 속에 자기 인생까지 허망하게 늙혀버리지 말라구요. 그러면서 그는 아주 의기양양했어요. 자기에겐 이 세상이라는 게 뜻밖에 수월하더라구요. 세상살이는 그저 쉽게 쉽게 살아 넘어가야 한다구요. 전 그 친구에게 짐짓 한번 대들어 봤지요.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구석은 .. 2015. 7. 18.
<문단속 좀 해주세요>, 이청준 나는 일찍부터 나름대로 한 권의 자서전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글로 씌어졌거나 서점에서 팔리는 실제의 책은 아니다. 마음속에 씌어져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런 식으로 쓰여지지도 않은 자서전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엔 자신의 그런 자서전을 한 권씩 지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나 같은 주제에 건방진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결국 그 마음속의 자서전을 현실 가운데에서 실현시켜가는 과정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어떤 사람은 구국 성웅 이순신 장군 같은 위인을 자기 자서전으로 삼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좀 뭣하기는 하지만 오나시스 같은 거부나 카사노바 같은 바람둥이를 그 자서전의 모델로 삼아 살아갈 수도 있다. 페스탈.. 2014.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