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일상

빵 헤는 밤

by 디어샬럿 2019. 2. 16.

빵순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더디다. 확 느껴진다. 시간의 유속에 둔감한 편인 내가 시간을 가장 강렬히 느끼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와 같은 빵 파티가 힘들어졌다는 것, 주말 내내 느긋하게 빵을 뜯어먹던 식습관과 강제로 이별하게 됐다는 것, 점심께 먹은 빵 때문에 다음날 아침까지 속이 더부룩한 날도 간혹 있다는 것... 아, 이렇게 근 10여 년을 이어온 나의 빵순 인생이 내게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다. 나는 발칙하게도 별 헤는 밤마냥 김영모며 나눔과베품이며 도쿄빵야며 이흥용이며 프레제며 옵스며 하던 빵집 이름들을 마음밭에 하나하나 새기다가 지워버린다.

김영모과자점에선 개당 8천원씩이나 하는 빼빼로를 샀었다. 오빠는 그 작은 것이 그만치나 비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반포동을 가장 좋아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김영모과자점 때문이었다. 공강의 틈에 9호선을 타고 신반포역에 내려 한낮의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곳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그때만큼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얼핏 봐도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직원들은 늘 일사불란했고, Y언니는 그 모습을 두고 ‘전형적인 자본주의 빵집’이라고도 했지만 그조차도 내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애호 앞에선 큰 흠이 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거기서 초코칩이 알알이 박힌 길쭈름한 페스츄리와 마늘바게트 같은 것들을 주로 샀다. 그곳의 빵도 좋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와 그 시간을 함께 났던 그 사람들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것 같다.

나눔과베품에선 클로렐라베이컨치즈를 제일 좋아했다. 바게트 정도의 길이인데, 식감이 말랑하고 치즈 인심이 좋아서 밥 대신 먹기 딱 좋았다. 그 빵은 나 말고도 우리 학교 재학생들, 특히 자취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작년에 학교 갈 일이 생긴 김에 생각나 알아봤더니 단종이 된 지가 오래라 해 나를 슬프게 한 그 빵. 그것의 존재를 알 턱이 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애먼 질문을 했더니, 놀랍게도 가끔 그 빵의 안부(!)를 묻는 분들이 계시다고 했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었을까, 나는 날로 사세가 확장되고 있다고 그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해진 나눔과베품을 나서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시간 같은 무언가로 위로 받았던 어느 청춘들- 헛헛한 마음의 가장자리에 작은 동지의식이 가벼운 자국을 남기고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산 와선 마린시티 옵스엘 출석하다시피 했다. 그곳에만 파는 키쉬가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키쉬만큼이나 맛있는 키쉬를 먹어본 적이 없다. 옵스 덕에 키쉬 좋은 줄을 알았다. 그 빵은 하나만 먹어도 너무 배가 불러 종일 밥 생각이 안 났다. 조금 지나니 그때 살던 집 바로 앞에 프레제가 생겼다. 거긴 식빵과 모닝빵이 맛있었다. 다른 데와 다르게 빵마다 습기를 머금은 듯 묘한 쫄깃함이 있었는데, 그 식감이 온전히 손으로 반죽하고 정직하게 발효해야만 얻어지는 거란 걸 안 건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그래선지 그집 빵은 많이 먹어도 배가 아프지 않았다.

오늘도 다녀온 이흥용과자점은 이름부터 제품군까지 김영모과자점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순간과 사람을 좀처럼 잊지 못했던 어느 시절까지, 나는 그때를 더듬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그곳을 찾을 적이 많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빵보단 시간을 산다는 느낌으로 거길 들렀던 게 아닐까 싶다. 언제부턴가 빵은 내게 그런 존재가 됐던 것 같다. 기호나 음식 이상의, 언젠가 스쳤던 시간의 작은 멍울과도 같은 것. 꼬들하거나 폭신한 제각각의 식감을 지닌 구워진 반죽 덩어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그 식감과 놀랍게도 닮았던 시간의 조각들을 곱씹어 보곤 하는 것이다.

꽂히면 밤낮 없이 먹곤 했던, 그러다 물리면 쳐다도 보지 않았던, 내 인생에 간헐적으로 등장해 배를 불려주었던, 맛만으로도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예전처럼 먹지 못하는 내가 사랑했던 빵들. 빵 하나에 추억과 빵 하나에 사랑과 빵 하나에 사람...같은 게 담겼을 리는 없지만, 내가 가장 사랑했지만 내게 가장 가혹했던 어느 시절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만 있는 것 같아 미련처럼 그 많은 빵들을 하나하나 헤어보는 밤이다.

'비밀의 화원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은 무엇일까  (0) 2019.04.07
이런 하루  (0) 2019.03.08
일단 뜨겁게 청소는 했는데  (0) 2019.02.05
1월이 다 갔다  (0) 2019.01.31
지치지 말아야지  (0) 2019.01.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