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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58

소비사회 ‘성실’과 ‘관용’의 이면 물질적 재화나 노동력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것들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생산되고 소비되기 위해서 관계는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통적인 인습이나 사회적 의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일반적이 된 기능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예의범절이나 에티켓의 종언이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무너졌다고 해서 곧 자발적인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관계 그 자체는 산업적 생산과 유행의 체계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성의 반대물이기 때문에 자발성에 관한 모든 기호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실함의 신앙'에 대한 묘사에서 리스먼이 지적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미 언급한 '따뜻함'과 '배려'에의 맹신이나 부재의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기호와 강제적 의례에의 신앙과 같은 종류의 신앙이다.. 2023. 10. 16.
이해한다는 것의 기만에 대하여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 2023. 9. 29.
생산 담론을 향한 작은 반기와 그 앞에 선 우리의 과제 :: 김재필, <ESG 혁명이 온다> '생산력' 담론은 인류사를 종횡으로 관통해 왔다. 높은 생산력을 향한 욕망은 시간이 더해지며 학습되고 전승됐다. 특히 자본이 본격적으로 인간을 장악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부터, 생산력은 자본 특유의 성격에 타협하며 지극히 물리적이고 수치적인 성과 위주의 개념으로 전용됐다. 오늘날 통용되는 생산력이란 적은 비용으로 많은 재화를 만들어내는 힘이나 마찬가지다. 패러다임 내지는 헤게모니 이상의 진리이자 금언이래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200여 년에 걸친 이 ‘당연함’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ESG의 등장이다. ESG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건 2~3년 전이다. 유수의 대기업 리포트에 당시로선 생경했던 이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화려하게 ‘주류 생산사회’에 등장했다. 지극히도.. 2022. 1. 8.
포스트-니체형 서문 역사란 결국 무엇인가?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철인가? 역사가 혹시라도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산 용설란을 발견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이나, 에레디아가 자기 영혼의 절망 앞에 사랑하는 야자나무 숲을 보지 못했을 때의 감정을 기록하는가? 충동, 동기, 인간에게 밀려드는 비밀스러운 생각들은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 의해 수거되어 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을 외과의조차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픈 감정을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나 전쟁을 빛낸 사망자, 즉 명확한 것만을 기록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방대한 책은 순간적인 것만을 요약한다(그리고 충분하다), 원인이 아닌 영향을. 그래서 나는 역사보다는 시간에서 찾는다, 그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인간은 그 비유다. 왜냐하면 비록.. 2020.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