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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일단 뜨겁게 청소는 했는데

by 디어샬럿 2019. 2. 5.

새해라기엔 어딘지 겸연쩍은 새해맞이 방 청소를 했다. 다른 데보단 책장이 정리대상 1순위였다. 이사 온 후 책들이 더 쌓여 감당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책더미가 바닥까지 침투했을 즈음에야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3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정리는 정확히 2배인 6시간을 들이고서도 끝이 날 줄을 몰랐다. 모든 청소가 그렇듯 책장으로 시작된 청소는 방 전체 단위로 커졌고, 방은 반나절을 꼬박 바친 뒤에야 최소한의 애정을 줄 법하겠다 싶은 공간으로 거듭났다. 어제까진 방 상태가 마구간 수준을 면치 못했다는 뜻이다.

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이나 공간만 차지하던 시리즈물을 큰 맘 먹고 빼냈다. 내놓은 것들 중엔 산 지 얼마 안 된 책도 있고 더 괜찮은 번역본을 구해 자리만 차지하게 된 중역본도 있으며 몇 번이나 망설이다 하는 수 없이 꺼내놓게 된 한때의 애장본도 있다. 내 시간의 흔적이 옅게나마 묻은 것들이라 그런가, 책이 하나씩 책장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얕은 감상에 발을 담그다 나오는 기분이다. 책탑이 10개쯤 쌓였던 걸 보면 150권은 족히 넘는 수였지 싶은데, 꼭 그만큼의 시간이 저만치 물러나는 듯해 정리로 분주한 틈마다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천 권이 조금 넘는 책들이 위아래 빼곡이 들어차 있던 서가에는 덕분에 공백이랄 게 조금 생겼고, 남겨진 책을 세다 팔백 몇에서 그만뒀다. 칸마다 새롭게 생긴 책 윗 공간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아직은 적응이 덜 돼 그렇겠거니 한다.

빠져나간 책들 중엔 셜록 홈즈 전집도 있다. 나는 열여섯 살 늦가을에 느닷없이 셜록 홈즈에 빠졌고, 그 해를 넘길 때까지 셜록 홈즈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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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슬럼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던 구역의 언덕 기슭에 있었다. 해운대가, 하다 못해 그 구역을 품은 동이 날로 화려해지는 것과는 달리 그곳은 날이 갈수록 빈집도 공터도 많이 생겼다. 거기서 살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소위 뜰 거라는 소문이 돌던 이런저런 동네로 하루가 다르게 이사를 했다. 반면에 학교들은 건재했는데, 초등학교 남녀중학교 남녀고등학교까지 지근거리에 한데 모여 있어 그 동네에서 한 번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애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비슷한 얼굴들을 보며 성인이 되곤 했다. 그렇게 옹기종기 붙은 학교들만이 한때는 사람으로 가득했던 영광스런 지난날을 기리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등하교 시간을 제외하면 인적도 드물 정도로 고요가 일상적인 곳이었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점 때문에 애들 공부시키기엔 괜찮은 곳이란 소문이 조금씩 나 전학생이 날로 늘어가던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 학교를 참 좋아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도서관이 정말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와 직선거리로 문구점 하나를 건넌 자리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다. 나름대로 천혜의 독서환경이 갖춰졌던 셈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은 시립도서관이라기엔 듣는 사람이 좀 머쓱해질 정도로 규모가 작긴 했다. 셜록 홈즈라고는 애저녁에 읽었던 걸작선 몇 권이 전부일 정도로 보유 서적도 빈약한 편이었다. 셜록 홈즈를 향한 직진 주행로에 들어선 나의 애정이 원하는 건 단편 몇 개를 이리저리 뜯어낸 모음집이 아닌, 흠 하나 가지 않은 전집을 통한 그와의 온전하고 완전한 만남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는데, 매주 받던 용돈 3천원으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2-3주를 모아야 16권짜리 전집 중 한 권을 겨우 살 수 있었다. 그 나름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있었겠지만, 급작스런 사랑이 낳은 어마어마한 속독력을 억누르기에 3주란 아무래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부모님께 손을 벌려 기어이 16권짜리 셜록 홈즈 전집을 손에 넣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비슷한 시기에 셜록 홈즈를 좋아하게 된 친구 세 명과 셜록 패밀리를 결성한 것도 그때였다. 전집을 가진 덕에 본의 아니게 내가 모임의 대장격이 됐고, 우리는 틈날 때마다 셜록 홈즈의 명석한 두뇌와 명쾌한 추리를 찬양하며 맹목적이다시피 한 애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삽화였다. 아서 코난 도일이 연재했을 당시의 그림을 그대로 옮겼다는 셜록 홈즈의 인물 삽화는 바로 봐도 모로 봐도 내겐 마냥 좋았다. 강박이 밴 길쭉한 다이아몬드 형의 날카로운 눈매, 매부리 끼가 있는 높은 코, 꼬리를 올리는 때가 없는 잘 다문 입, 헌칠한 키...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보고 있노라면 (그때의 내 눈엔 너무나도) 미남(이었던) 탐정이 당장이라도 특유의 눈짓으로 미제사건을 해결해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히 아이돌 팬덤 수준의 애정이었다. 우리는 뤼팽을 (멋대로) 모종의 라이벌로 여겼는데, 모리스 르블랑이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라는 작품을 낸 걸 안 이후론 그의 졸렬함(!)에 진심으로 분개하며 틈날 때마다 뤼팽의 구조적 모순이라든지 허점을 찾아내고 토론했다. 심지어는 내 외모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뤼팽 인물 삽화에 고개를 젓고 셜록 홈즈 삽화를 보며 묘하게 우월감을 느꼈으니, 이쯤 되면 거의 견제팬덤을 대하는 진성 덕후의 자세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사랑은 짧았다. 혹독했던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을 거치며, 내게 셜록 홈즈는 여유로웠던 시절 좀 즐겨 읽었던 추리소설 정도의 존재로 전락했다. 책장 가장 중간을 차지했던 전집들은 한 번의 상경과 두 번의 이사를 거치며 점점 아래로 뒤로 밀려났고, 2019년 구정에 단행된 책사(冊事)로 말미암아 책장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신세가 돼 버렸다. 생각해 보면 셜록 홈즈로 추리소설 좋은 줄을 알았다. 열정은 식었을지언정 내 안에서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이정표 같은 존재로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중고서점에 내놓기 위해 이렇게도 미련 없이 셜록 홈즈 전집을 모조리 내놓을 줄, 17년 전의 나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애정은 시간 앞에서 이토록 무력한 법이다.

책장에는 이제 셜록 홈즈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없다. 나의 아주 짧은 어느 시기를 보듬었던 그 책들은, 다른 누군가의 또 다른 시절을 빛내기 위해 이 집을 떠난다. 진작에 끝난 애정이라 생각했지만 서가에 생겨난 공백을 마주할 때마다 허전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뜨겁게 청소한 자리에 아직은 미처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조금은 서늘하게 손끝에 닿아오는 음력 새해의 첫 날. 보낸 시간만큼 더 의미 있는 새 활자들로 더욱 뜨거워져야지. 떠나보낸 것들이 남긴 온기로 적당히 데워두는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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