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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니체형 서문 역사란 결국 무엇인가?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철인가? 역사가 혹시라도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산 용설란을 발견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이나, 에레디아가 자기 영혼의 절망 앞에 사랑하는 야자나무 숲을 보지 못했을 때의 감정을 기록하는가? 충동, 동기, 인간에게 밀려드는 비밀스러운 생각들은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 의해 수거되어 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을 외과의조차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픈 감정을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나 전쟁을 빛낸 사망자, 즉 명확한 것만을 기록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방대한 책은 순간적인 것만을 요약한다(그리고 충분하다), 원인이 아닌 영향을. 그래서 나는 역사보다는 시간에서 찾는다, 그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인간은 그 비유다. 왜냐하면 비록.. 2020. 3. 7.
조심해야 하는 사람 요 며칠 내 일상의 절반은 '타자-되기'의 실사 체험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마치 라캉의 수제자라도 되는 양 충실하고 올곧게 내 스스로를 타자화했다. 엄밀히 말하면 라캉 식 타자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어딘지 처량하기까지 한 작업이었지만 타인이 되어보긴 되어본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타인의 삶을 투영하느라 나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실망하고 좌절하고 지쳐 마감하는 하루의 앞에서, 나는 불과 몇 달 전의 모든 것들을 돌이키고 있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최후의 방패막이었을 줄은. 그 마음을 몰랐고, 그 상황을 몰랐다.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생각한다. 그 고마운 마음과, 이제야 윤곽을 드러낸 또 다른 마음을. 나는 이따금 '겪는 게 최선'이라며 타인의 말보다 내 경험을 지나치게 앞세.. 2020. 2. 26.
당연 거부 선언 부쩍 울퉁불퉁해진 마음 탓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그리고 계속 건너가야 할, 혹은 더 격하게 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의 굴곡 탓인가. 그러기엔 오지도 않은 것들에 이렇게나 하루에도 몇 번씩 쿵쿵 내려앉을 일인가. 멀미와도 같은 감각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참아내야 하는 날들이, 정녕 그 탓인가. 절대 아니다. 나는 '당연한' 것들에 지쳤다. 왜 내가 당연한가. 인간에 대한 실망에 절어 나의 나날을 반추한다. 왜 내가 하는 것들은 당연하고, 채근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에 대고 묻지만, 반향도 답도 없는 침묵만 돌려받길 수 일 째. 이런저런 이유로 울퉁불퉁해진 마음을 건너는 날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중이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한 날엔 책마저도 읽기 싫어.. 2020. 2. 18.
초월식 사고 몸이 좋지 않았다. 오전에 병원에 들렀다. 경미한 장염이라 했다. 이 증세로 아파본 게 근 6년 만인 것 같다. 약을 먹고 오후 내내 혼절한 듯 잠이 들었다. 약은 생각보다 독했고, 몽롱한 채 깨어보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었다. 모로 누워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너비 7cm 높이 14.5cm짜리 직사각형의 세계는 초를 다투며 터져나오는 천재 감독의 수상 소식을 잔뜩 응축해 놓고 있었다. 고작 네 시간의 공백에도 따라갈 뉴스가 제법 많았다. 나는 그새 문명의 이기가 빚은 여유를 노동이 재빠르게 대체한 현장의 산 증인이 돼 있었다. 물론 그런 행위도 노동이라 표현하는 걸 허락한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그 단어가 주는 중량감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자세조차 ‘노동’이라는 단어가 넓은 아량으로 품어준다는 전제 하.. 2020. 2. 10.
B와 D 사이 이 순간조차 배워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러기엔 너무 힘 빠지는 이 시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느슨해진 틈으로 또 다시 들이닥친 사건과, 그로 인한 분노와, 질책과, 허탈함과, 고이고이 퇴적된 다 놓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부터 되짚어 가야 할까. 내 삶이랍시고 꾸역꾸역 밀어넣는 이 시간들에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날 땐 어떡해야 할까.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까. 이 시간조차 너끈하게 이겨내야 할 터인데, 그러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많은 것들로 나약해졌고 무엇 하나 올곧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또 얼마나 더 실망하고 울어야 할까. 사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는 여기서 뭘 더 선택해야 하나. 나로부터 기인하지 않은 말들과 판단들에 지친 날들 가운데 내려꽂힌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돌아보는 퇴근길. 보호막.. 2020. 2. 4.
베토벤 2020. 2. 2.
어떤 시간 꿈을 꿨다. 눈을 뜨고선 잠시 멍했다. 대개의 내 꿈은 굴절이 심한데, 오늘은 현실과 너무 딱 맞아떨어져 조금 서글펐다. 장면들을 곱씹다가, 숨겨둔 생각들과 마주했다. 나의 가장 못난 것들이 통제되지 못했던 며칠이었다. 나는 잠식당했고,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타인의 자기장에 너무 무방비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 타인의 중력에 이리저리 휘둘린 날들이었다. 중력을 잃은 존재 한가운데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비수들이 내리꽂혔다. 서운하고 서글픈 건 지극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여태껏 받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전해지지 못한 - 내게 왔어야 하나 타인에게로 향한 - 말들이 떠올랐다. 언어의 표면에 천착하느라 미처 읽어내지 못한 마음들을 하나하나 그렸다. 그제야 조금.. 2020.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