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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2016년 읽은 책들, 짧은 평들

by 디어샬럿 2017. 1. 4.

변곡점이랄 만한 사건이 크게 없었던 해였음에도 독서량이 형편 없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중도포기한 작품이 너무 많았다. 시간이 없다기엔 내 시간들의 용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지라 핑계를 대기도 낯부끄럽다. 그나마 부끄러운 양심에 변론이라도 하자면,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다 차분히 읽어낼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한 탓이라고 할까. 목표에 한참 미치지도 못했을 뿐더러 장르 편중은 올해도 극복하지 못했다. 반성하는 차원에서 올려보는 2016년 통독 목록.

1.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 대학 때 소설을 제외하고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사회과학서와 역사서적이었다. 아무래도 전공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만히 돌이키면, 사회과학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대부분이었다. 프롬의 대표 저서를 모처럼 읽으면서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물론 프롬은 정통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기보단 포스트 프랑크푸르트에 가깝지만. 책은 1950년대 이후 현대 소비사회의 양태를 소유 양식으로, 지향점을 존재 양식으로 논증한 불멸의 역작이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두고두고 '추천 도서'로 전승될 작품이리라. 풍부한 예시와 문학성이 넘치는 문장으로 쉬이 쓰인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시대와 계층을 넘어 회자되는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의 입문서로도 더없이 좋은 책. 다만 해결방안이 미진했던 프랑크푸르트 특유의 한계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2.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7)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知)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통용되던 작품이었다. 이성과 종교의 세계를 대변하는 나르치스와, 감성과 사랑의 절정체인 골드문트의 상반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삶이 냉철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빚어졌다. 사실상 골드문트의 인생 역정에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지만, 막바지에 이르러 골드문트의 조각상에서 종교적 숭고함을 찾아내는 나르치스의 깨달음으로 전체적인 균형추가 맞춰지고 있다. 진리란 결국 형태의 상이함을 초월한다는, 당시 서양문학에서는 쉬이 보기 힘들었던 동양철학적 메시지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삶과 깨달음이란 소재를 두 인물의 진한 우정을 통해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역시 청춘의 작가 답다.

3-4.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 기 년 전부터 한 해를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시작해 왔다. 2016년의 첫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박형규 교수의 뿌쉬킨하우스 번역본 출간을 기다리다 못해 동서문화사 판으로 구입했다. 명성이 아깝지 않은 대작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전쟁을 벌인 1812년 무렵의 러시아가 생생한 필체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 단연 일품이다. 당시 세계 정세 및 러시아 국내 정치 상황, 러시아 귀족층의 풍습, 실제 전투에서 사용된 병법과 전투 지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적 가치도 증명하는 부분.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매력은 단연 풍성한 등장인물일 터. 이 소설도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론 안드레이에 가장 애착이 갔다.

5. <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1) 단독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실상 3편의 중편이 이어진 중단편선이다. <첫사랑>이란 제목을 믿고 아련한 분위기를 상상했다면, 꽤 처참히(!)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터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연적이 된다는 패륜적(!!) 줄거리에도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라면, 청춘을 향한 통찰과 예찬 덕일 것이다. '상실'과 '상처' 그리고 '사랑'을 맥락으로 한 세 단편의 통일성도 눈에 띈다.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단편은 <무무>인데, 나 역시도 이 작품이 가장 좋았다.

6-7. <죄와 벌>, 표트르 도스토옙스키 / 이 소설을 중학교 때 처음 읽었다. 그리고 근 15년 만이었다. 읽고서 분노했다. 이렇게 멋진 작품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괴로워하며 힘들여 꾸역꾸역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읽었던 문고판 <죄와 벌>은 독자 우롱 수준의 미완본이었단 사실도 알아버렸다. 무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도끼로 내려치는 장면에서 끝나버리는 문고판이라니, 아무리 청소년 용이어도 어찌 그리 무책임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다시 읽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일날 뻔했다. 총 5부, 1000쪽에 가까운 분량 중 노파 살해 부분은 원작으로 1부에서 끝이 난다. 그 뒤는 주인공의 심리와 자기합리화, 주변상황과 그로 인해 회개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놀라우리만치 촘촘하고 날카로운 인간 내면 묘사.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Back To The Basic이란 말이 이토록 어울릴 수가 없는 소설. 꽤 많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었지만, 단연 최고였다.

8.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200쪽 남짓한 분량이지만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소련 시절 15년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한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이 녹아들었다. 체제에 대한 직접적이고 날선 비난보다는, 혹독하고 냉엄한 수용소 생활의 면면을 세세히 그려내는 데 주력함으로써 어찌 보면 완곡한 고발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직접 경험하지 않고선 도저히 그려낼 수 없고, 읽는 이조차 때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현실 묘사는 역설적으로 체제를 더욱 날카롭게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9-10. <휴먼 스테인>, 필립 로스 / 로스에게는 미국이 자랑하는 현대 문학가라는 수식이 붙는다. <에브리맨>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지라, 조금 기대하고 책을 펼쳤다. '인간의 얼룩 (혹은 오점)'이라는 제목처럼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모순점과 비밀을 안고 있다. 대학에서 그리스 비극 고전을 가르치는 콜먼은 유대계 백인의 인생을 살지만, 실은 '운이 좋게도' 피부색이 매우 옅은 흑인이다. 흑인으로써 매번 성공의 문앞에서 좌절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숨기고 백인 지식인으로 제도권에 편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회적 명성을 모두 잃게 된 원흉은 흑인 여제자에게 의도치 않게 인종차별을 내포한 단어를 내뱉으면서였다. 철저히 몰락해가면서도 끝끝내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콜먼의 이중성은 <휴먼 스테인> 전반을 관통하는 모순점이다. 노년의 콜먼에게 사랑이자 성욕의 대상인 포니아는 문맹인 척하지만 알고 보면 글자를 모두 알고 있는 여성이다. 이뿐인가. 콜먼을 대학에서 제명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젊은 여교수 델핀 루는 사실 콜먼을 누구보다도 짝사랑하고 있는 이이기도 하다. 다소 충격적인 전개와 상징적인 결말이 한동안 머리를 맴도는 작품. 그러나 로스의 작품 전체를 두고 보면, 주제의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참고로 로스는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하루키와 함께 유력한 후보로 꼽혔었다. 덕분에 9월말 무렵 로스의 책이 반짝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웬걸, 상은 엉뚱한 이에게 돌아가 버렸지만.

11. <달려라 토끼>, 존 업다이크 / 할 말이 없는 소설. 소설의 세계관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공의 행태를 도무지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작가의 역량에까지 의문을 품게 되는 작품. 연작 중 첫 작품이라지만, 다른 작품을 읽어볼 생각은 없다.

12.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 소설가 김연수 씨가 번역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KBS TV책이 개편 후 가장 첫 작품으로 소개한 책도 아마 이 작품이었을 것이다. 현대 미국사회의 인간적 단절과 세계의 허무를 2-30쪽 남짓의 단편들로 엮어냈다. 기존의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에겐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세계다. 명확한 기승전결이 없다는 점이 아무래도 크다. 읽다 보면 최근의 우리 문학가들이 이 작가의 영향을 꽤 받았구나 싶은 지점도 발견된다. 개인적으로는 크게 감명 깊진 않았다.

13.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문학계의 길티플레저랄까. 제인 오스틴은 아마도 그런 존재 같다. 선뜻 즐겨 읽는다고 말하기가 어딘지 부끄럽지만, 재밌어서 읽지 않을 수가 없는 작가.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좀 다른 점이라면, 나는 제인 오스틴 작품을 좋아한단 말을 꽤 대놓고 한다는 점이겠지(발그레). 게다가 인간 군상과 내면에 관한 치밀한 묘사와 해석력은 단연 일품이다. 오스틴의 길지 않았던 생과 평생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이력에 비춰볼 때, 가히 천성적이고 탁월한 분석력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킬링타임용' 작가라기엔 오스틴 입장에선 꽤나 억울하지 않겠나 싶다. 이 책이 아마 <오만과 편견> 직전에 쓰인 작품일 것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언니 엘레너와 민감하고 격정적인 감성의 소유자인 매리앤 자매의 사랑 이야기라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굉장히 성기게 비유하자면, 이성과 감성의 양면을 뚜렷이 부각한 점에서만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결을 함께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스틴은 엘레너의 생각을 자주 빌린다는 것. 원작에서 엘레너의 상대가 되는 에드워드 페라스는 지극히도 매력이 없는 목사 지망생이지만, BBC 클래식드라마에서 이 역을 맡은 댄 스티븐스는 '너무' 미남이었다. 게다가 달콤함은 어찌 그리 폭발해 버리신 건지! "Can you forgive me?" "Can you love me?" "Would you marry me?"로 이어지는 삼단 질문폭격 프로포즈는 영원히 인류에(?) 회자되리라... (물론 원작에는 없는 장면이다.)

14. <에마>, 제인 오스틴 / 해의 마지막을 함께 한 셈인 책이었다. 독감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리면서 읽게 된 작품. <오만과 편견> 혹은 <이성과 감성> 등의 전작으로 제인 오스틴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에겐 다소 생소한 주인공과 상황 설정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거액을 상속받을 예정인 귀족 에마 우드하우스의 착오와 성장, 사랑을 그린 작품. 오스틴의 전매특허인 '남편 찾기'가 가장 극적이고 여지없이 발현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결국 남편은...... 비밀! 더불어 <이성과 감성> 제작시기 즈음하여 BBC에서 이 작품 역시도 드라마로 재해석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자주인공이 너무나 멋있어서 꼭 한 번 보려고 벼르고 있다.

15.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 조금 힘들게 읽었다. 우리나라에 현재 나와 있는 번역본이 창비판과 펭귄클래식판인데, 전체적인 평가가 우세한 쪽을 골라 전자를 선택했다. 출판사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창비 세계문학은 가독성이 떨어진다. 독자들의 성화에도 꼿꼿하게 자세를 바꾸지 않는 예의 특이한 지명, 인명 표기부터...

16.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 출간 직후부터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서 마니아 사이에선 입소문이 익히 나 있는 책이었다. 줄리언 반스의 책은 항상 읽어야지 마음만 먹었는데, 이 책으로 처음 글을 접했다. 매력적이었다. 숨을 삼키며 반전들을 좇았고, 꽤나 충격적인 결말에 읽어 온 흔적들을 몇 번이고 뒤졌다. "결국 한 번 더 읽게 될 것이다"던 작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17.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5) 다자이 오사무의 중단편선이다. 단독 타이틀을 내세우지 않고 각각의 제목들을 모두 언급했다. 어떤 의미에선 정직해서 좋다.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하면서도 재기발랄한 문장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 군국주의 혹은 전체주의,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혼란기를 관통하는 오사무 특유의 통찰력도 빛난다. 개인적으론 <인간실격>보다 좋았다. <쓰가루>와 <옛날이야기>는 특히 추천...이라 쓰고 보니 사실상 이 책 자체를 추천하는 게 더 맞겠다.

18-21. <태엽 감는 새>, 무라카미 하루키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55) 미루고 미루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은 작품이었다. 쓸데없이 부채감처럼 남았는데, 후루룩 읽어냈다. 기존의 하루키의 작품들의 전형적인 세계관을 떠올리면 된다. 딱 <해변의 카프카>와 <세계의 끝...>의 중간지점 같은 작품이랄까. 당분간 하루키를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22. <페스트>, 알베르 카뮈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8) 기억이 맞다면 중학생 때 처음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그때는 카뮈 좋은 줄을 몰랐다. 진가를 알게 된 건 올해였다. 신호탄이 되어 준 작품이다. 해 온 공부가 있어선지, 나는 짧은 호흡으로 문장을 쳐내는 작가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카뮈나 헤밍웨이 같은 스타일 말이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상황을 묘사하고 플롯을 전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웬만한 인고와 퇴고가 아니라면 감히 시도조차 못해볼 터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특유의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카뮈는 제3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오랑의 비극을 전한다. 페스트가 급속도로 퍼진 후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관광도시 오랑의 음습함과 절망이 코끝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은 문장. 페스트가 진정세에 접어들면서 일상을 되찾는 오랑의 국면마저도 카뮈는 절대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응이 늦었던 시 당국의 안일함을 문학적으로 비판하고, 인간의 맹목성을 페스트에 비유하는 부분에선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만 같은 생생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책을 읽었던 때가 메르스 사태로 시끄러웠던 즈음으로부터 딱 1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카뮈의 통찰력에 놀라며 한 장 한 장 넘겼던 기억.

23. <이(방)인>, 알베르 카뮈 / 카뮈에 완벽히 빠져들게 한 작품.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은 아예 외워버렸다. 서두만 해도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메마르기까지 한 것 같은 뫼르소는, 작품 중반을 넘어 비정상적 총격 살인사건을 저지르며 이중적이고 냉혹한 본성을 드러낸다. '뫼르소'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주는 여러 중의적 상황으로 비춰볼 때, 프랑스어를 알았더라면 좀더 생동감있게 언어의 맛을 느끼며 읽어낼 수 있었을 듯. 그렇다고 작품 자체의 감동이 덜해지는 건 아니다. 참고로 내가 읽은 문학동네 판은 기존 번역본과 달리 제목이 <이인>이라 번역돼 있다. 카뮈 전문가이기도 한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은 민음사판인데, 문동판도 괜찮았다.

24. <복종>, 미셸 우엘벡 / 현대 문단의 '문제적 작가'로 거듭나고 있는 미셸 우엘벡의 최근작이다. 2015년에 사 두고 도중에 읽기를 간뒀다가 이듬해 완독했다. 이슬람계 이민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의 현실과 맞물려, 책은 출간 직후 세계적인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슬람이 프랑스 정권을 잡는다는, 일견 허무맹랑할 수 있는 설정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가능성을 전파하며 한 해 내내 회자됐다. 특히 이 책의 출간기념회 즈음에 하필 파리 테러가 터지는 바람에 더 그랬다.

25. <구관조>, 허윤석 / 기십 년째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는 천재작가 '한'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문학 전담기자 박의 타박에 괴로워하던 그는 언제부턴가 말하는 구관조가 나오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한과 구관조로 대변되는 몽환적 공상세계와 실존의 의미를 그려낸 수작. 다소 어렵지만 읽어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1966년에 쓰인 1부와 1970년대 중반 집필된 2부를 합쳐, 단행본으로는 1979년에 나왔다 한다. 현학적인 문체라든지 시대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부 단어만 제외하면, 소설이 피력하는 주제의식은 현대의 그것 못지않게 파격적이고 세련됐다. 육체적 성인 혹은 원죄적 인간으로서의 길목에 각각 위치한 몸종 월매와 간통의 대상인 아끼꼬의 존재, 그리고 수년 간 이렇다 할 작품을 써내지 못한 한 자신의 자괴감이 집약된 상징물이 바로 구관조인 셈이다. 가시적 플롯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주를 이루던 당시 우리 문단에 보기 드물게 치열한 내면세계 묘사만으로 이끌어 간 온전한 장편소설이란 점에서, 현대소설의 한 갈래를 제시한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26. <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56) 고등학생 때만 해도 김승옥 작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조각난 지문으로 접하는 그의 언어는 음울하기가 그지없었다. 으레 단골로 출제되던 <무진기행>에는 눅눅한 습기까지 감돌았다. 그러고 보면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게 꽤나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어쨌든 요사이의 내게 그는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대책없는 청춘을 그려내는 작가다. 이십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작가생활이었지만 문단에 연일 충격을 던져준 문장을 구사했던 사람. 주제 우려먹기라는 비판에 서서히 직면하기 시작했던 작가적 말년을 돌이켜보면, 어쩌면 전설인 채로 남게 된 그 짧은 이력이 축복일 수도 있을 터다. <내가 훔친 여름>과 <60년대식>의 두 중편소설로 이뤄진, 김승옥 연작선 중 두 번째 문집. 개인적으론 <60년대식>이 더 좋았다.

27. <생의 이면>, 이승우 / 이승우 식 문장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말들에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빛난다. 신학을 전공하고 실제 신학생활을 한 삶이 녹아든, 인간의 본성을 고찰한 그의 이야기들도 좋아한다. <생의 이면>은 두 번째였는데, 여전히 좋았다. 어떤 의미에서든 두 번은 읽게 만드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문장에 반했다가, 읽을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미들에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 '생의 이면'이 무엇인지, 작가가 명확히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인터뷰 형식을 취한 내용에서조차도, 소설 속 화자이자 작가 박부길은 의미의 해석을 독자의 손에 맡긴다. 부정하고픈 역사에 가까운 부성을 이어받은 한 인간 존재를 이르는 것인지, 단지 여자의 사랑 때문에 신학의 길을 결심했다 단숨에 그 길을 저버린 개인사적 굴곡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인간적 모순인지. 아마도 읽을 때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다시금 떠오르리라.

28.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완서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0) 지금은 그만큼은 아니지만, 박완서 작가를 정말 좋아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산 최초의 한국 소설이 아마 박완서 작가의 단행본이었을 것이다. 그 책을 기숙사 창가에 앉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최초로 산 연작선의 주인공도 박완서 작가였다. 이런 애정의 역사가 무색하리만치 지금은 거의 찾아 읽지도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읽어도 편안한 건 역시 그녀의 글들이다. <부끄러움...>에는 젊―다고 하기엔 등단 자체를 마흔에 한 작가라 어딘지 객쩍어지지만―은 박완서의 패기 넘치는 문장들이 포진해 있다. 무리하지 않는 묘사들이 빚어내는 에두른 사회 비판의 기지조차도 독자를 감탄하게 한다. 대표작인 <부끄러움...>을 비롯해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 <도둑맞은 가난> 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단편들이 다수 수록돼 있다.

29. <사람의 아들>, 이문열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6) 인간적인 평가를 차치하고, 나는 작가로서의 이문열의 역량은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청준 작가와 더불어 서사력 하나만큼은 국내 문단 역사상 최고 작가라 본다. 특히 <사람의 아들>만큼은 작가 이문열에 그 어떤 의문부호도 제기할 수 없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만한 깊이와 고민과 플롯을 담아낸 한국 장편소설을 찾기가 정말 쉽지가 않다. 다만, 글은 무릇 그 사람을 담아내는 법이거늘, 아무리 개인사가 그렇다 할지라도, 오만하고 독선적이기 짝이 없는 작가의 인간적 행태는 실망스럽기가 그지없다. 여러모로 독자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하는 작가다.

30. <거짓말이다>, 김탁환 / 이 작품에 그 어떤 평을 할 수 있을까. 나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책이다. 책을 펼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장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김탁환이란 작가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느껴지는 그의 작가적 사명감만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이자 비극을 지켜본 이로서 뜨겁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이 언제고 남아 그날과 그분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면 한다. 문학에는 힘이 있다.

31.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 두 말 할 필요 없이 유명한 작가인데도, 정식으로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벼르던 작가였는데 음...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백의 그림자>를 읽어봐야겠다.

32. <쇼코의 미소>, 최은영 / 2016년 한국 문단 최고의 라이징스타는 단연 최은영 작가일 것이다. 출간 전부터 예약 폭증 사태를 불러 일으키며 모처럼 한국 소설에 활기를 불어넣은 장본인. 나 역시 이 소설을 구하는 데 며칠간 애를 먹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사랑스럽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소설들이었다. 1984년생 젊디젊은 작가의 맑은 문장이 소박한 이야기와 만나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비슷한 시절들을 겪어온 여느 세대들이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이 주는 친숙함이 반갑고, 그 소담한 재료들로도 깊은 맛을 우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놀라게 된다.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마따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

33. <2016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경욱 외 / (http://dearcharlotte.tistory.com/144) 한 해의 1월 중순 즈음엔 항상 이상문학상을 읽게 된다. 언제부턴가 수상자들 명단을 보며 의아한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국내 최고의 문학상임엔 이견이 없다. 그나마 올해는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2014-15년에 비해 작품의 질은 올라간 느낌이다. 김경욱 작가는 유독 이상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는 느낌이었는데, 드디어 빛을 봤다. 이 작가의 뒷심에 언제나 아쉬움을 느껴왔던지라 작품으로는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익숙한 이름이라 참 반가웠다.

34. <글 쓰는 삶을 위한 일 년>, 수전 티베르기엥 / 모처럼 글을 만들고 싶어지게 하는 책. 두고두고 읽으며 세계를 만들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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