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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문학상 두 편과 <너무 한낮의 연애>

by 디어샬럿 2017. 2. 5.

 

1.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 서울역을 서성거리다, 그 책을 보았다.

서울역엔 항상 분주한 속도감이 묻어 있었다. 시간에 쫓긴 시선과 마음들이 항상 그 공간의 공기에 섞여 있었다. 하행선 열차를 기다릴 적이어도, 거기선 편안함보단 영문 모를 초조함을 느낄 때가 더 많았다. 서점은 그곳에서 유일하다시피 홀로 느긋하게 서 있었다. 나는 걸음을 약간 늦추고서, 책들이 사람보다 곱절 이상은 많은 그 작은 곳으로 나른하게 몸을 집어넣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가판대가 길을 막았다. 아마도 해의 초입이었던 것 같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전성태 작가의 얼굴이 새겨진 <201X 현대문학상>이었다. 전성태 작가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 해를 기준으로 5-6년 정도 됐을 터였다. 일단 다른 것부터 보고 있자, 생각나면 사면 되지. 나는 전성태 작가를 곁눈으로 둔 채 이런저런 책등을 눈으로 훑었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으리라. 무엇인지 기억도 못할 책을 하나 집어들고 보니 어느덧 차 시간이었다. 바삐 계산하고 승강장까지 달음질 친 후 숨을 돌리고 보니 생각났다, 그 책.

현대문학상의 첫 기억을 차지하는 건 그런 장면이다. 승강장에서 잠깐의 머물다 사라진 아쉬움과 함께.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접했다. 웬 바람이 들기도 했던 것 같고, 수상작가도 궁금했다. 작년에 출간한 단편소설집으로 유명세와 호평을 동시에 거머쥔 이였다. 우리 세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단 한 사람에게만 상이 수여된다는 점도 마음을 끌었다. 그렇다고 수상자의 단 한 작품에 그치는 건 아니었고, 수상소감도 자선 대표작도 심지어 '수상후보작'이란 이름으로 여러 작가의 글이 나오는 건 이상문학상과 차이가 없었다. '단 한 사람'이 되지 못한 이들의 이름과 작품이 이상문학상보다 작은 글씨체로 촘촘이 새겨진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근 4년 이내 수상자의 최근작을 싣는 것 역시 다르긴 했다.

수상자인 김금희 작가를 비롯해 후보작가까지 면면이 이미 익히 근래 알려진 인물들이다. 계간지나 문학상에 두어 번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건, 감히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반열에 들었대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들인 셈이다. 요즘따라 유독 그런 이름들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게 된다. 친숙한 이름들을 새삼 눈에 새기고, 곧 펼쳐질 세계의 이름들을 눈으로 더듬는다. 하늘색과 흰색의 네모반듯한 조합과 바탕체의 새삼스런 세련미도 보고, 수줍은 듯한 작가의 시선도 따라가 본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국화가 입을 열 때마다 선배는 힙하고 쿨한 우울한 청춘에서 어딘가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흔한 20대로 달라졌다. 그만하면 화낼 만도 한데 노아 선배는 이상하게 분노에 휩싸이지도 속을 끓이지도 않았다. 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금희 <체스의 모든 것>, p.22)

첫 장에 닿자마자 나를 놀라게 한 건 만연체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작가는 생각을 이어붙이고 단어의 꼬리를 물며 문장을 늘어뜨렸다. 죽죽 따라가다 보면 네다섯 줄이 지나서야 마침표 한 번을 찍는 문장을 만날 적도 심심찮았다. 조금 당황했다. 요즘 작가 치고는 문장을 조금 길게 쓰시는구나, 하고 온점일 듯 짧은 발을 내린 쉼표들을 몇 번이나 만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소설 속 동아리방의 소재를 찾다 나의 대학시절 과방을 떠올렸다. 처음 1년간은 정경대 건물 1층 구석에, 그 후에는 단과대가 바뀌며 줄곧 아트센터 지하 2층에 자리했던 공간이었다. 두 곳 다 왠지 눅진하고 어두컴컴했다. 그런 공간에서 체스를 두는 노아 선배와 국화라니. 게다가 주인공은 혹여나 노아 선배가 국화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마음을 졸이면서 그 광경을 보고만 있다니. 그 공간을 마치 실체적 진실처럼 두고 존재하는 학과라든지 동아리 같은 것들이 품은 인원들에 비해, 이상하게도 그런 공간들은 항상 말도 안 되게 작았다. 아주 연한 회색 물감을 아주 조금 타 놓은 파레트 물통 같은 공기가 머무는 공간.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낸 건, 심지어 낭만적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청춘의 힘일 것이다.

남은 싸움을 하든 말든 콩국수를 후루룩 들이키는 "정말 대단히 무심한 애",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지 않은가" 싶은 국화 그리고 "이것은 OO이 아니다"는 자조적 농담과 왠지 지켜봐주길 바라는 듯한 자발적 고립으로 대표되는 노아 선배. 가장 극단에 있는 것 같았던 둘은 체스 규칙을 두고 아웅다웅하더니 이내 모든 주제에서 투닥거리며 줄곧 붙어 다녔다. 그러나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서로답지 않은 방식으로 급작스레 관계의 종언을 맞는다. 모순은 그들의 짧다면 짧은 만남뿐 아니라 인생도 뒤흔들었다. 그렇게도 현학적이었던 노아는 증권사원이 되었고,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리라"며 선배를 부끄럽게 했던 국화에겐 몇 번의 자살시도 이력이 남았다. 노아의 이혼 뒤 둘은 잠깐 만났던 것도 같지만, 여전히 "체스만 둔다"고 주인공에게 말한다. 그마저도 이제는 모두 옛일이 되었다고. 노아는 거나하게 취한 채 "내가 다 틀린 것 같다"고 말하고, '나'는 "틀린 게 아니"라고 울컥이는 목을 진정시키며 대답할 뿐이다.

결국 모두가 부끄러움을 이기며 살아가려 한다. 노아는 워킹홀리데이에서 흑인 부랑자에게 겪었던 작은 모욕을 이겨내려 대학시절 내내 그렇게도 '당연한 것'을 쉽게 규정하는 이들에게 공격적이었던 것이다. 공격적이리만치 무심해 보였던 국화는 거대한 좌절에 몇 번이고 쓰러지려다 꿋꿋이 일어나 작은 삶들을 직조하는 30대 후반을 맞고 있었다. 주인공 역시 노아와 국화를 지켜보며 품었던 질투와 열등감과 부끄러움을 꾹꾹 누르며 어느 시절을 견뎌왔다. <체스의 모든 것>엔 부끄러움을 딛어오르려던 청춘의 기억이 있다. 다채색의 개성만큼 다양했던 우울과 그 나름의 세계를 품은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새긴 시간의 빗금이 체스판처럼 교차하는 소설이었다.

* * *

권여선엔 카프카가 더해져 제목처럼 짙은 잿빛이 감돌았다. 김애란엔 데뷔 때와 같은 재기발랄함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건가 싶어 맴돈 아쉬움이 조금. 안보윤엔 사회적 당위나 정의마저도 선택적으로 외면 혹은 망각하는 어느 개인의 무던하고 무심한 잔인함이 빛났다. 이기호의 자전적 삽화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소설엔 한참을 웃다가, 파안의 호수에 핀 연꽃 같은 씁쓸함을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이장욱은 자가당착 증후군이라 봐도 무방할 한 인물의 모순 가득한 인생을 희극적이면서도 단단한 문장으로 빚어냈다. 조현에겐 명랑한 상상력이 돋보이나 너무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낸 메시지가 소설을 잠식해버렸단 인상. 최정화는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


2.

연초의 힘을 느낀 건 손가락에서부터다. 현대문학상까지 읽고 나니, 기왕 이런 거 3대 문학상을 다 쓸어보자 생각했다. 매년 10월경 발표되는 게 동인문학상이다. 직전년도 수상작은 권여선의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다. 손이 어느덧 알라딘을 켜더니, 손가락이 금세 주문완료 버튼을 눌렀다. 알라딘은 배송도 어찌나 빠른지 그 다음날 바로 받아봤다. 꼼짝 없이, 그러나 부푼 마음이 채 꺼지기도 전이라 즐겁게 읽어내려갔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놀란 그녀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역광>, p.173)

책을 덮고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이 "아유, 술냄새"였다. 가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와 ― 너무 자주는 안 된다 ― 달짝지근하기도 하고 어딘지 쇳스런 냄새인 것 같기도 한 말술의 잔향을 여기저기 달고 온 사랑해 마지않는 내 사람 ― 이게 중요하다 ― 의 어깨를 살짝 치며 눈을 곱게 흘기며 한다면 딱 좋을 것 같다.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한 번 내뱉어 보려다 속으로 삼켰다. 몽상은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된다. '생산적'이지 않은 것들은 속으로 담아둬야 할 적이 훨씬 많은 법이다. 어느 인생이건 상황이건 그렇게 삼켜야 할 것이 많았다. 아니, 쓸모없는 말이기에 더 삼켜야 했다.

어쨌든 책에는 달큰한 취기가 감돌았다. 일곱 이야기의 화자들은 죄다 한 번쯤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헤롱거린다. 책 뒷표지에 첨언한 문학평론가 황정아는 이 책을 두고 '주류(酒類)문학'이라 말했다. 책 뒷표지를 보며 웃은 건 처음이었다. 모로 보나 바로 보나 이번 단편선의 중심소재는 단연 술이다. 내심 하던 의심은 작가후기에 이르러 확신이 됐다. 아, 술을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좋아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가 없는 글들이었다. 사랑 우정 회한 고뇌 따위의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좋아하는 걸 썼는데 동인문학상까지 받아버렸다는 것. 어마어마한 건 물론이거니와 낭만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말이다.

책 표제인 <안녕 주정뱅이>는 수록작품의 제목이 아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주정뱅이'들의 이야기를 한데 묶었다고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야기는 여느 만취꾼의 그것이 그렇듯 진심이 우러나온다. 다른 점이라면 이 주정뱅이들에겐 잡소리가 없어 훨씬 듣기 편하다는 정도다. 어쩌면 <안녕 주정뱅이>는 술이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술이란 그런 것을 준다. 본연의 고독과 우울마저 용납되는 기회, 한없이 허술해지는 틈에서 솟아나는 인간적 연대, 무엇보다 말짱한 정신으론 결코 내뱉을 수 없는 결핍들을 터놓고 이를 수 있는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안녕 주정뱅이>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없음'을 말한다. 남들에게 있어보이는 인생, 삶을 있게 한 것들이 실은 없음에서 출발했다는 반어적 인과들을 찾아가는 여정이 녹아 있다. 주인공들은 자발적 의지라기보단 차라리 술이 북돋워준 무모함을 안고, 아이러니 투성이의 삶들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를테면 상대와 세계를 체념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에 이른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들엔 고요한 우울이 맴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편에 가깝다. 취하는 게 싫다느니 나약해보여 자제한다느니 하는 '건실한' 차원이라기보다, 단지 맛이 내 취향이 아닌 탓이다. 그러나 이 책을 덮으며 조금 고민했다. 오늘밤엔 술을 마실까. 맥주보단 소주라면 좋겠다, 여기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소주를 마시니까. 그러고보니 소주를 마셔본 지가 정말정말 오래 되었다. 그 술이 맛은 참 내 타입 아니어도 마시다 보면 나름 달큼한 게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소주에 입술을 댄 기억이 언제인지 세어보다가 생각했다. 나같은 세미-금주가조차 술을 당기게 하다니, 진정 엄청난 문장들이라고.


3.

<너무 한낮의 연애>에 손이 간 건 <랩소디 인 베를린>과 비슷한 이유였다. 현대문학상으로 처음 접한 김금희 작가의 글이, 뚜렷하게 박히지가 않았다. 알 것 같은 느낌도 모를 듯한 의문도 흐릿했다.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다면 포기라도 했을 텐데. 한편으론 단 한 편의 글로 누군가가 새겨온 문자의 궤적들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작년 한동안 워낙 인기도 많았다. 언젠간 읽어봐야겠다 싶었던 책이었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너무 한낮의 연애>, p.42)

좋은 선택이었다. 이따금 조금 울 뻔도 했는데, 새벽 탓이겠거니 한다. 책을 읽고 문득, 소설이란 것엔 어쩜 그리 특이한 사람들이 겹을 이룰까 생각했다. 특정 시공의 반경에서 100명 중 다섯에 꼽힐 이들이 어째서 소설이란 외피를 쓰면 모든 인간이 되어버리는 걸까 하고. 그러다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에겐 충분히 '다섯'이 될 수 있단 데 생각이 미쳤다. 새기기만 하고 묵혀둔 내 인생의 서랍을 열어 어느 지점을 유심히 펼치면, 그것 역시 남들 눈엔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사연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주인공들이 지닌 공허 혹은 고통의 양상은 조금씩 다르다. 자꾸 줄어가는 직장 내 입지에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고(<너무 한낮의 연애>,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는 세계를 지닌 누군가가 있다(<조중균의 세계>, <반월>). 믿었던 혹은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성적으로 유린당한 이가 있고(<세실리아>, <개를 기다리는 일>) 거리를 좁혀오는 가난에 저항하고 협박 어린 부탁에 시달리다가 급기야는 시체와 한집살림을 하게 된 여자(<고기>)가 있다. 고아원에서 학대 당한 기억을 "공평한 사랑"이라 애써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우리가 어느 별에서>)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결핍을 안고 사는 가족(<보통의 시절>)도 등장한다. 몇몇은 경악스러우리만치 충격적이거나 애틋해질 정도로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이들은 무미건조하게 흐른 시간을 딛고 과거를 관조한다. 삶의 살갗을 튿어낸 폭력을 기어이 덮어내고야 만 시간 혹은 무심함의 딱지. 아직 완전한 살이 되지 못한, 아마도 온전한 살이 되지는 못할 상처를 마치 타인의 것인 양 낮게 읊조리는 무던한 문체들이 외려 가슴에 박힌다. 화자들은 너무 곡진하지 않게 아픔을 말하고, 너무 유난스럽지 않게 재생(再生)을 다짐한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너무 지나치지 않은 것들을 거듭 견디는 게 아닌가. 만연체에도 나는 어느덧 적응을 하고 있었다. 그조차도 너무나 제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이다.

단편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필용은 말한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며,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하기까지 하다고. 아픔을 불러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특히 그 아픔이 공동의 성격을 띨 때, 더러는 희생까지 요구하며 고통의 당사자에게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이젠 잊으라고도 한다. 침묵하게 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너무 한낮에 드러난 것들은 해가 지면 너무 쉽게 식어버리지만, '너무 한낮'과 '너무 새벽'을 몇 겁이나 견딘 고통은 "열도"를 지닌 온기가 되어 시간을 넘나든다. 아픔을 잊지 않고 말하는 것, 뭉근한 기록이 될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결코 지지 않는 것. 세계를 지키는 건 아마도 그런 것들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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