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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쓰가루 / 석별 / 옛날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by 디어샬럿 2016. 8. 22.




“왜 모험이 자랑거리가 되나요? 바보스러워라. 믿는 것입니다. 꽃이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이를테면 임시로 모험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 모험심이 없다는 것은 당신에게 믿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천박한 것입니까? 믿는 것은 사도(邪道)입니까? 아무래도 당신들 신사는 믿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다루기가 어려워요. 그것은 머리가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저속한 것입니다.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것만 생각하는 증거입니다.” (p.359, <옛날이야기 - 우라시마> 중)



파멸과 우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동판 중단편선이다. 책 제목에서 언급된 세 작품이 정확히, 순서마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수록돼 있다. 정직하다고 해도 좋을 인상이다. 대표작 하나만을 전면에 내세워 의도치 않게(?) 독자를 우롱하는 단편선집에 적잖이 속은(??) 경험이 있어 더 그렇다. 400편짜리 대서사를 기대하고 잔뜩 기합을 넣어 책을 펼쳤다가 100쪽짜리 단편 네 개를 만났을 때의 묘한 허무함이란. 이 나이가 돼도 싫다. 물론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덜컥 책을 고른 내 쪽의 잘못도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지 속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표지에서 아예 일러주니 좋다. 단편이니까, 싫으면 다른 걸 골라주세요 라는 느낌. 어딘지 당당해 보여서도 좋다.

그리고 이 책은 당당해도 된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정하고 쓴 듯한' 문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문장에 대한 기호엔 다분히 개인적 취향이 반영되게 마련. 그럼에도, 이이의 문장을 읽고 입이 떡 벌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은 독자는 감히 없으리라 본다. 다자이의 문장은 어렵지 않다. 그의 문장에는 현학적인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극히, 너무나도 쉬운 언어들이 빚어내는 글들. 그는 에두르지 않는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가 투명하고 또렷하게 가슴에 꽂힌다. 어딘지 안쓰러울 만큼 솔직해서 잊히지가 않는 문장이다.

세 이야기의 공통점에 대해, 책의 역자는 후문에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을 허무는 작업'이라 밝힌다. 공감은 가지만 왠지 거창한 것 같다. 내가 읽어낸 키워드는 '과거'와 '자신'이다. 팔 할 이상의 본인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인 <쓰가루>, 루쉰의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시절 이야기를 가공의 화자의 회상 형식으로 그려낸 <석별>, 일본 전래동화를 다자이 식으로 재치있게 해석한 <옛날이야기>까지. 이야기들은 과거를 돌이키는 작업으로써 각각의 '자신'을 찾아나간다.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보모 다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나', 도쿄에서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조국(중국)에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각하는 20대 루쉰, 구전동화 속에 숨겨졌을 법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해석하면서 '일본다움'을 피력하는 '옛날이야기'들. 전반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본질을 찾기 위한 과거 이야기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이르면 으레 축축한 습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이 단편선만은 철저하게 예외다. 다자이 오사무가 이렇게 재치가 넘쳤던 인간이었던가 싶다. 상황의 틈새를 잇는 놀라운 상상력과 문장 하나하나에 깃든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피식대는 건 기본. 웃음의 역치가 낮은 나 같은 사람들은 빵빵 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약간 쓴맛은 돌 법한 웃음이다.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음습한 책망이 여지없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이라면 얼추 비슷할까. 은은한 감동도 있다. <쓰가루>에서의 보모 다케와의 무뚝뚝한 만남과 쏟아지는 안부인사, <석별>에서 후지노 선생님이 루쉰에게 '석별'이라는 글자가 적힌 자신의 사진을 주는 장면은, 극적이지 않음에도 목울대가 적당한 온도로 따뜻해진다. 이런 글을 쓰는 다자이 오사무는 꽤나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은 누구보다도 사람과 삶을 사랑했을, 그의 진면모가 여기저기 묻어나는 것만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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