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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2017년 이상문학상 변론, 그리고 <랩소디 인 베를린>

by 디어샬럿 2017. 1. 30.

 

새해가 밝았다고 말하기도 머쓱해지는 시간이다. 그새 이상문학상은 마흔 한 번째 이야기를 선보였다. 언제부턴가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지 않으면 새해를 맞지 못한 기분이 든다. 챙겨보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손꼽아 보니 어느덧 아홉 회차다. 문단에서 정평난 작가들조차 매년 막달을 설레게 한다는 상 ― 작품집은 1월에 발간되나 발표는 12월에 이뤄진다 ― , 작가 인생의 가장 굵직한 한 줄이자 평생의 힘이 되어준다는 상, 무엇보다 비슷한 명성의 상들이 한 차례는 겪었던 설화와 파문이 여직 없었던 상. 작가의 글과 세계에 관한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인정이 바로 이상문학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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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에 들어가기 전, 곁가지 얘기를 먼저 해 보려고 한다. 이상문학상에 대한 논란에 관해서다. 근래 몇 년은 이 상에도 회의적인 시선이 짙게 스몄다. 무엇보다 수상 작품들에 대한 의문들이다. 다만 이 점은 오롯이 이상문학상에 떠넘길 문제일 수는 없잖은가 싶다. 문학은 그 본질을 묻는 수많은 질문에 시대에 외로이 맞서고 있다. 당면한 현실이 인간에게 성찰의 여유를 앗아가고, 문학의 역할이 영상과 기타 매체로 수도 없이 대체되고 있는 시대다. 문학 스스로가 가진 것들로 세월의 격랑에 홀로 대답하고 증명해야 하는 시간들. 시와 소설의 시대적 효용이 수많은 '이기'들에 자꾸만 움츠러드는 속에서, 문학상과 문학에 예전의 권위와 수준을 기대하는 게 어쩌면 조금은 겸연쩍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면, 그야말로 누구도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의 시대적 존재 이유와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과연 이 질문에 누가 시원한 일갈을 해줄 수 있겠으며 그것이 '문학 이외의' 이들에게까지 시원하게 가 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비판은 또 있다. 조금 거친 언어로 소위 '작가 돌려막기'라 일컬어지는 부분이다. 이는 이상문학상이 견지하는 '대상 수상자의 재수상 불가' 원칙에 기인한다. 한정된 작가들 내에서 시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보니 매년 수상작의 질적 저하가 도드라지는 것 아니냐고. 주최측이나 개별 작가들에겐 아픈 말임이 당연하지만, 독자 입장에선 이상문학상이란 이름이 주는 기대에 배치되는 수상작들에 대한 아쉬움에 나올 수 있는 성토이기도 하다. 반면 대상 재수상 불가 원칙은 작가 발굴 측면에선 분명 당위성을 갖는다. 어느 쪽이라 한들 섣불리 손을 들어주기가 힘든 면이 있다.

 

 

변론이 길었다. 굳이 이러쿵저러쿵 상을 언급한 이유는, 올해 수상작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대상작에 이렇듯 갈증을 느껴본 것이 이전에도 없진 않았다. 다만 올해는 여태까지의 허우룩한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 형체를 갖춘 의구심이 되어버렸다. 구효서 작가는 충분히 유명한 이름이었다. 구체적 작품으로 접해본 적이 없어도 친숙했다. 영화 <동주>의 모티프 소설 원작자이기도 한 인물이다. 때문에 내심 더 기다린 것 같다.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쥔 <풍경소리>를 다 읽고 나니 드는 건 이래저래 복잡한 감정. 좋게 말하면 주제의식과 작법이 뚜렷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전해지는 소설이다. 글로써 청각 감각을 풀어내려 노력했고, '공(空)'과 '생(生)'을 문장에 녹이려 고심한 흔적도 눈에 띈다. 그렇기에 외람된 말론 평론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읽는 내내 소설의 낱장들을 머물렀다. 안타깝게도 후자의 인상이 더 각인되는 건 왜인지. 인간 존재적 의미가 능란한 문장으로 깊이 묵었다 보기에도 힘들고, 마지막의 감동 코드는 다소 갑작스런 느낌까지 준다. 외려 동인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이기도 한 자선 대표작 <모란꽃>과 당선소감이 주는 울림이 훨씬 컸다. 수상작만으로 섣불리 재단하기엔 못다 드러낸 세계가 있겠지 싶었다. 모란꽃이 들려준 이야기와 소감에 새겨진 진심에 미련이 남았다. 중편 하나로 함부로 작가를 재단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소리를 일컬어 누군가는 천뢰라 했고 누군가는 옴이라 했고 누군가는 태초의 말이라고 했다. 저들 미와와 수봉은 묘음이라고도 대적이라고도 영, 공, 빵의 소리라고도 했다. 그러나 일컫는 말은 일컫는 대상과도, 뜻과도, 하나일 수 없으니 무어라 일컫든 제대로 일컫는 게 아니고 마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이름이 해당 만물을 잃고 만물이 해당 이름을 잃어 이제는 임의의 약속과 간주로만 겨우 만물의 이름을 대신하는 시절이 되었으니. (구효서 <풍경소리>,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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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랩소디 인 베를린>을 펼쳤다. 교회 오르간의 풀무질을 하던 조선계 독일 농노 힌터마이어와 재일조선인 2세 음악가 김상호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 소설이다. 두 사람에겐 '조선인'이면서도 각기 타국에 뿌리를 두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 김상호의 경우 일본에선 야마가와 겐타로로, 독일에선 토마스 김으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특출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지만 오르간 연주자이자 자신의 상관인 아르블링거의 수족에 지나지 않은 삶을 살았던 힌터마이어, 그런 힌터마이어의 삶과 음악을 좇아 북한을 찾았다가 졸지에 반체제 인물로 몰려 남한에서 17년간 옥살이를 한 김상호. 평생을 변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주인공의 비슷한 환경과 설정은, 이 소설의 주된 맥락이자 흥미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김상호의 일대기는 많은 면에서 작곡가 윤이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실제로 김상호가 소설 속에서 설명하는 동양의 음률 철학을 따른 현대 서양음악은, 윤이상이 실제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구현한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책은 인류 역사의 방대한 어느 지점을 개인들의 삶과 연결시키는 데 주력한다. '디아스포라'를 한국과 독일 역사에 병치시킨 점이 그것이다. 전자는 전쟁 이후 디아스포라의 당사자로, 후자는 유대인을 탄압함으로써 또 다른 디아스포라의 가해자로 기능케 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역사적 상황을 대입하면서 각각의 인물들에 필연적 굴곡을 배치한다. 주인공 각자의 '뮤즈'인 레아와 하나코라는 설정도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한다. 다만 하나코와 키르호프의 '비밀'들은 극적이다 못해 작위적일 정도로 부자연스럽다. 우연의 지나친 중첩, 단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등장인물들도 아쉽다. 주제의 무게를 채 견디지 못한 플롯의 중량감 부재도 씁쓸하다. 그러나 <풍경소리>에 비하면 훨씬 작가에의 확신을 심어준 작품임은 분명하다. 450쪽을 넘는 장편을 이 정도로 엮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재 우리 문단에선 귀한 인물인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올해 환갑을 맞은 베테랑 작가에게 감히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활자들이 품은 의미를 몇 번이나 되짚어보게 한다. 디아스포라라는 테제에 가려지고 기록들에 겹겹이 녹은 무수한 개인의 비극.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간 점존재들을 곱씹게 한다. 국가적, 민족적 차별과 폭력과 전쟁으로 터전을 잃고 삶의 선택권을 제한당하고 박탈당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동족상잔의 최전선에서 영문도 모르고 싸워야 했던 청춘들, 영원이 될 줄 모르고 집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들, 특정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스실에서 짐짝처럼 죽어가야만 했던 인종들, 그 모든 후손들. '시대'를 함부로 내걸고 수많은 삶들을 까닭없이 사지로 몰아넣은 역사의 지점들을 좇으며, 나는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정주에 면해 있었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의 약산을 바로 뒤에 낀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의 나라를 위해 청운의 꿈을 품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누구에게나 그랬듯 모든 것을 앗아갔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잃었고,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으며, 꿈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서 살았고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와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사셨다. 이래저래 내려오는 자리에도 평생을 거절하셨다 한다. 자신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에서 외따로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세월이란, 그 세월을 건너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심정이란 얼마나 고통스런 것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여주는 장면이 이따금 나올 때, 끝도 없이 이어지던 사람 찾는 종이들 사이에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 섞여 있었다. 눈을 감으시기 직전까지 묵은 종이에 정주 인근의 고향집을 그리셨다는 할아버지. 그 외로움과 간절함의 무게를, 내가 어떻게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끝내 영변 약산 진달래꽃을 생전에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신 때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통일은 감히 염원하기에도 너무 아득한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국토 최북단에 가까운 고향땅과 대각선으로 떨어진 남단에 잠들어 계신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역사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시절의 희생양이 된 개인의 아픔에는 둔감한 것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디아스포라라면 아득한 나라의 이야기 같지만, 멀지 않은 우리 역사에도 타의에 의해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곧 돌아갈 줄 알고 임시변통으로 판자점포를 마련한 게 어느덧 70년이 됐더라던, 우리 동네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서 밀면집을 하시는 실향민 할머니의 인터뷰가 문득문득 생각날 적이 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단단하게 기억하는 것일 터다. 비극의 숙주가 자가증식하는 시대와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경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삶과 존재를 발끝까지 부정당한 수많은 역사의 부표들을 깊고도 아프게 생각하는 것. 그 점만으로 이미 이 책이 갖는 의의는 충분한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세상 어떤 땅 위에서는 32막사가 다시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사례가 없었다면, 믿음은커녕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분명 사례를 겪었고, 그리하여 그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구효서 <랩소디 인 베를린>,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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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들은 예년보다 개성이 뚜렷했다. 김중혁엔 여전히 희극적 긴장감이 넘치고 윤고은엔 황당함의 외피를 당당히 뚫는 통찰력이 빛났다. 이기호의 글은 고밀도의 구조와 호흡이 플롯의 탄성을 더하고, 조해진의 글엔 섬세한 문장으로 역사와 인간을 향한 고민을 그려내는 힘이 보였다. 한지수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든 건 조해진의 글이었다. 더 읽어볼 기회를 언제든 만들어 볼 생각이다.

우리는 왜 거기까지였을까, 그런 의문이 나의 화두인 적이 있었다. …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뻔뻔하다는 생각은 이 세상이 오물 위에 세워진, 부서지기 쉬운 구조물이라는 환멸로 이어질 뿐이었다. 게다가 거의 완전히 잊힌 그 전쟁을 나만은 기억하며 살게 될 거라는 예감은 끔찍하기만 했다. 그녀도 똑같았을 것이다. 아니, 증언의 무용함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허무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조해진 <눈 속의 사람>,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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