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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어느 탐나는 기록,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

by 디어샬럿 2016. 8. 26.


4년 전 겨울은 엉망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세차게 흔드는 초조감에 겨우 익숙해지나 싶었을 무렵이었다. 해의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짙은 불안이 바싹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예고 없이 불쑥대는 불안에 발을 종종거렸다. 나는 불확실한 것에 면역이 되어 있지 못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인간의 틈을 손 쉽게 파고드는 법이다. 어느새 불안감은 내 발치에 그림자처럼 매달렸다. 초조와 불안이 빚어낸 나의 그림자는, 해가 없는 저녁이면 외려 더욱 축축하게 드리워왔다. 나는 까닭 모를 한기에 몇 번이나 몸을 움츠렸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수시로 찾아왔다.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을 읽었다. 억지로 청한다고 올 잠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혹 느닷없이 의식의 초인종을 눌러댈 잠을 위해, 너무 몰입되는 책은 최대한 피한다고 한 것이 김승옥의 소설이었다. 작가의 두 번째 전집인 <환상수첩>을 그때 읽었다. 그 책엔 표지를 닮은 연회색 공기가 감돌았다. 청춘의 언저리에 막 진입한 김승옥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그 부연 대기 속에서도 손을 더듬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시대의 습기를 잔뜩 머금어 축 처지고 나른해진 몸일지언정 의식만은 또렷했던 그 소설의 인생들은, 당시의 내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나는 책을 붙든 채 스르르 잠들곤 했다.


* *


다행히 초조와 불안의 오한으로 떨던 밤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는 불안에 머리 끝까지 잠식당하지 않게 됐다. 더없이 좋은 와중에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었다. 김승옥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나는 책과 작가가, 독자가 그를 접했던 특정 시기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책 한 장 한 장에 감정이 스며 눅눅해지고 진득해지는 것이다. 김승옥의 책엔 나의 초조하고 불안하고 우울했던 날들이 배어 있었다. 그의 문장은 대담하기 그지없는데다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김승옥의 문장 하나하나에 나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하다못해 점 하나에까지도 내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돌아보지 못했다. 그때의 나의 감정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를 읽지 못했다.





정말로 4년만이다. 서점을 거닐다 홀린 듯 다시 김승옥을 집어들었다. 그 사이 나는 어느덧 불안에도 쉽게 잠식당하지 않게 됐다.  '여름'이라는 제목에 동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여름은 누가 훔쳐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더웠으니까. 게다가 제목이 풍기는 고전적인 도회미가 대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훔친 여름>이라니! 어찌나 감동했는지 한동안 메신저 상태메시지로 해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서 당당하고 대범하게, 그의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책은 두 개의 중편소설로 구성돼 있다. 1967년에 발표된 <내가 훔친 여름>과 이듬해 세상에 드러난 <60년대식>이 그것이다. 김승옥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 이 책에도 그의 자전적 요소를 품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전성은 특히 <내가 훔친 여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다니(나 사실상 휴학을 가장한 자퇴 상태)는 주인공 이창수는, 그의 이력을 들여다볼 때 거의 작가 본인의 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학교를 다니다 말고 고향에 틀어박혀 할머니와 방을 공유하며 사는 이창수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본인을 중학교 동창인 장영일이라 소개한다. 여기저기 여드름이 얽다시피 자리를 차지한 피부와 웃을 때 한 쪽 얼굴이 묘하게 틀어지는 모양을 보고서야 그는 영일을 알아본다. 대뜸 그에게 대학동문임을 자처하는 영일의 가슴팍에는 서울대 법대 배지가 빛나고 있다. 우격다짐에 가까운 영일의 권유로 둘은 무전여행을 떠나게 되고, 창수는 영일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별 수 있냐며 내버려 두기로 한다. 한편 창수는 기차간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애호박과 풋고추를 섞은 것 같은 여인" ― 그녀의 이름은 쪽지 말미에 '숙자'라고 잠깐 등장한다 ― , 예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 이 여자가 뇌리에 박힌다.


둘은 여수에 도착한다. 땡전 한 푼도 묵을 곳도 없다. 그러다 공짜 차를 얻어마실 요량으로 들어간 다방에서 서울대 선배 남형진을 만난다. 창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 형진에게 서울대 미대생이라 창수를 속여 소개한 영일 탓에, 창수는 형진의 부탁을 받고 졸지에 지역 지주의 아들인 강동우의 캬바레 데코레이션을 떠맡는다. 더불어 영일도 강동우네가 주최하는 단합대회의 연설문 작성을 도우면서 둘은 강 씨네 집에 묵게 된다. 우연히 강동우네 가족 대화에서 막내딸 동순이 정혼자를 극구 거부하고 열렬히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다름 아닌 선배 남형진이었다. 그토록 그가 강씨네의 반대에 부딪친 이유는, 형진의 부친이 소위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수는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님을 간파한다. 동순의 정혼자네 집안이 부산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대부호였던 것이다. 강 노인은 자기 사업적 전략상 동순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 약혼을 감행했고, 2주 후 식을 치를 것임을 통보한다. 단합대회에서의 형진과 강 씨 가족의 한바탕 소동 이후, 동순과 형진은 사랑의 도피를 실행에 옮긴다. 창수는 강 노인의 천박한 생각에 신물이 났다. 더불어 사랑이란 것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의 적극성에 의문을 품으면서,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보는 자리에서 창수는 기차간의 숙자, 즉 "겨드랑이 옷감이 튿어진 아가씨"를 다시 만난다. 마음이 동한 창수는 아가씨를 불러내 밤 늦도록 여수 밤바다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다지 대화가 통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지만, 결국 여인숙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쿰쿰하고 눅눅한 땀의 공기 속에서 창수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이름 모를 그녀를 '여름'이라 부르기로 한다.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다. 동우의 뜻을 어겨 형진을 도왔고 가짜 미대생이란 것도 들통날 테고 몸까지 나눈 아가씨에겐 아직 사랑이랄 만한 대단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고민하길 그만둔다. 별 수 있나, 다만 그의 앞엔 '그가 훔친 여름'만이 있을 따름이다.


"한 여자에게서 사랑을 받음으로써 저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던 것입니다. …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동시에 자기와 전 세계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깨달았습니다. 책임 있게 살려면 때로는 남에게 요구해야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 발 벗고 나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흔히들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만 제 경우엔 '책임지고 싶으니까 우선 자유를'이었습니다. 제가 욕망하던 자유란 제가 가지고 있던 강박관념 또는 피해망상증으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강박관념 자체는 책임이 아닙니다. 우선 저에게는 자유가 있어야겠고 그 다음에 진정한 나의 책임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p.217)


"내가 훔친 여름"은 결국 숙자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내 숙자라는, 기차간에서 찰나에 스친 쪽지에서 본 두 글자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는 다만 그녀를 여름이라 이를 따름이다. 그녀는 그에게 온전히 그 시절만의 여름이 된 것이다. 때론 이름보다 강렬하게 남는 이미지도 있는 법이다. 창수가 1967년 여수의 여름을 돌이킬 때마다 그녀가 "거대한 바다와 작은 좌판이 어우러지던 바닷길"의 한켠에 있을 테니 말이다.


김승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는 그의 소설 상당수의 배경이 된다. 작가는 <무진기행>과 달리 이 작품에선 여수라는 실제 지명을 바탕으로 작품을 그려낸다. 으레 작은 장이 함께 서기 마련이었던 개발 이전의 여수항, 어느 시절에나 있었을 자유와 열정에 고픈 청춘들, 들숨마다 들며 어느새 그곳을 지나는 이들마저 제 품으로 불러들였을 여수 바다... 여수의 여름은 주인공마저 뒤흔든다. 딱히 무언가 좋을 것 없이 살았던 그조차도 여수가 좋아진 것이다. 


창수는 김승옥의 지문이 가장 많이 묻은 이다. 그의 전작들의 계보를 이어 허무와 회의의 외피를 입은 성격에, 실제 작가의 삶과 생각과도 매우 근접한 인물이다. 그러나 창수는 전작 주인공들을 뒤따르지 않는다. 그는 주저앉거나 피하지 않기로 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대학을 자퇴한 것처럼 또 한 번 장동우네서 도망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종국엔 특유의 "별 수 있나"로 여수와 여름 그리고 이 순간에 남기로 한다. 내가 훔친 여름이란, 어찌 보면 쟁취할 용기가 없어 물러서기만 했던 주인공이 '훔치면서까지' 가진 생에 대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허무와 회의에 더는 잃고 싶지 않은 현실과 낭만과 사랑이야말로 그의 "여름"이었던 셈이다. 낭만적이지만 허무한 김승옥 표 청춘의 변곡점이랄까. 드디어 삶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그 젊음이, 나는 살짝 가슴 찡하리만치 반가웠다.


* *


<60년대식>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사회 교사 도인이다. 그의 아내인 주리는 배우다. 둘은 파경 상태다. 사실 정식으로 혼인한 적도 없으니 이대로 헤어지면 남남이다. 주리는 무명 때 도인을 만나 살다 유명세를 얻고 월남 위문을 간 뒤 소식이 없다. 도인에게 남은 건 하숙 단칸방과 주리의 물품 몇 개, 낡은 책 수백 권. 학교도 그만둔 도인은 자살을 결심하고 가진 책을 모조리 정리한다.


그러다 문득 대학 때 고바우 하숙집에서 잠깐 몸을 섞었던 애경이 생각났다. 애경은 그 집 다섯째 딸로, 한 번 시집을 갔다 왔다. 도인은 '남자로서의 성능을 시험해 볼 첫 대상'(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시대였다...)으로 그녀를 점찍었다. 둘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도인은 애경을 책임져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그만 도망치고 말았다. 어느덧 팔 년이 흘렀다. 그는 제대로 사과하고 싶다. 죽음은 일단 내일로 미루기로 한다. 수소문해 찾아간 애경의 소재지는 춘목결혼상담소. 상대 남자들의 조건에 맞춰 맞선 상대가 되어준 대가로 수입을 버는, 이른바 '스파이'였다. 그러나 이제 와 도인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둘은 고급호텔 카페에서 추억을 되새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낯선 사내가 도인에게 다가와 애경에 대한 사항을 말하며 속지 말라며 경고한다. 그런데 어쩐지  남자가 꼭 애경을 좋아하는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둘은 호텔방에서 육체의 재회를 하기 직전에 이른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간 애경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호텔 복도를 거닐던 도인은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야릇한 음성으로 곧 애경임을 알아챈다. 새벽 세 시가 돼서야 돌아온 애경에게 지난 8년의 얘기를 들었다. 그녀의 삶은 어쩌면 도인 이상으로 굴곡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 도인은 애경에게 지난 일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만, 애경은 애초에 용서할 일이 없었다고 못을 박는다. 애경의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면서도 허무한 건 어쩔 수 없다. 학교에 들른 도인은 자신이 없이도 너무나 잘 돌아가는 학교의 모습에 언제든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한동안 끙끙 앓은 도인은 이제야말로 죽을 때임을 직감하고 헌책을 정리하러 나서지만, 책은 제 가격은커녕 문전박대 신세나 당한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에 불법 성인영화 영업에 이끌려 동하지도 않는 시네마스코프를 보다,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오니 어제의 사내가 도인을 아는 체 한다. 사내는 여전히 애경을 사랑한다 말하고, 그녀와 미국엘 떠나겠다고 말한다. 사내의 열정을 보며 도인은 죽음을 잠시 더, 어쩌면 조금 오래 더 미루기로 한다.


도인은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그에게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정열 ― 그것은 확실히 도인에게는 서먹서먹한 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도인 그 나름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서먹서먹한 말인 것이다. 그렇다. 도인이 가장 경계하는 것들 중의 하나야말로 바로 정열이라는 것이었다. 도인의 이해 속에서 정열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가장 나쁜 원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 이제야 도인은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과도한 정열이, 또는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빚어내는 인간에 대한 과오를 경계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는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조차 닳아 없어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다. (pp.415-417)


60년대식이란 제목은 무엇을 이르는 것이었을까. 본격적으로 생명체를 움틔우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토양? 토양을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릴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인간의 속물근성? 돈에 처참하리만치 밀려난 사랑의 처량한 몰골? 그럼에도 순정을 믿고 지키며 도전하려는 '현대인답지 못한' 몇몇의 누군가?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고, 그 모든 게 아닐 수도 있다. 김승옥은 다만 도인과 애경과 사내의 시간들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시간들이 엮이며, 60년대의 생활과 역사와 이성과 지성은 소설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애국심에서 일확천금의 기회로 변질되기 시작한 월남행, 이십만 원의 잠자리를 위해 원칙도 깨 버리고 호텔 보이들의 비웃음도 아랑곳않는 애경, 한때는 지성의 밑거름이자 자아의 기반이 되어주었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걸 보냐"는 핀잔만 들으며 박대당한 헌책들, 그에 비해 대뜸 만 원을 호가하는 단 한 권 섞여 있던 도색잡지... 


그러나 한편에는 헌책방 주인의 노골적이고 천박한 속내에 내 일인 양 나서 싸우는 리어카 일꾼이 있고, 애경의 진짜 모습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서서히 용기를 내려는 사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일꾼은 큰소리 내기 싫어 싸움을 말리는 도인에 대고 겁쟁이라 소리치고, 사내는 애경을 향한 순애보를 내심 비꼬는 도인에게 "형은 지식도 많고 교양도 있고 선량하지만 정열은 없다"며 "정열 없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고 말한다. 도인을 질책하는 인물들의 말이 어딘지 현대인을 향한 일갈 같기도 한 건 나만의 느낌일까. 사내의 말은 도인에게 특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회피하며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죽음을 조금 더 미루는 도인의 어깨엔 어느덧 삶을 향한 욕구가 흩뿌려져 있다. <내가 훔친 여름> 속 창수처럼, 도인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청춘의 작가라 불리는 소설가들이 으레 존재한다. 내게는 김승옥과 헤르만 헤세가 그렇다. 특히 김승옥은 더욱 극적인 데가 있다. 아마도 그의 인생이 덧그려진 탓일 터다. 김승옥의 작가로서의 인생은 기껏해야 15년 남짓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화려한 문장으로 특유의 우울하고 묵직한 청춘의 감각을 그려내며 우리 문단의 영원한 대들보감으로 일찍이 낙점됐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의 미래를 뒤바꾸어 놓았다. 잔혹한 살상에 한 마디 말도 못하는 당시 문학계에 대한 환멸로, 그는 문단을 완전히 떠났다. 짙은 먹빛의 아프도록 뜨거운 젊은 날의 기록만을 남긴 채.


그래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많은 후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청춘의 소설가로 남았다. 한정된 시대를 그려낸 배경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 십 년을 거뜬히 뛰어넘는 문장과 문제의식으로 여전히 찬탄을 자아내는 한때 문단의 총아였던 천재. 시간을 견디는 글의 힘이란 정말이지 대단한 것 같다. 심지어 소설가 이응준의 헌사에 가까운 작품해설마저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청춘이기에 이토록 우울하고 이만큼이나 넘어져도 이렇게 욕심나리만치 찬란할 수 있는 걸까. 기꺼이 훔치고 싶으리라, 이토록 탐나는 여름과 정열과 삶과 사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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