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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순간19

무지몽매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별안간 낯설다. - 불현듯 사랑이 모호해졌다. 사랑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챙겨주고 싶은 마음? 어떤 형태로든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나를 다른 이들보다 특별하게 아껴주길 바라는 마음? 자꾸만 생각나고 궁금해지는 마음?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에는 진절머리 나도록 정통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생각하려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 무어냐는 질문의 벽에 가로막힌 나는, 세계에 입성하지 못한 이방인마냥 온종일 그 언저리만 서성이고 있다. 도대체 사랑이 뭘까. 타인과 타인이 만나 온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게 가능은 하다는 말인가. 아주 사랑했던 -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 사람(들)을 떠올린다. 어느 시점에서 뜬금없다시피 솟아올라 강렬한 열기로.. 2019. 5. 12.
행복을 비는 마음이란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문장을 쓰며 새삼 생각해보았다.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나는 어떤 때 주로 해 왔던지. 못내 아쉽거나 더없이 슬프거나, 여하튼 감정에 제법 습기가 들어찬 때 나는 누군가의 행복을 빌곤 했다. 내 행복을 비는 말들을 며칠에 한 번 꼴로 마주한 날들이 있었다. 이 산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한 길의 문턱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던 시간들이었다. 심장을 졸이며 통지를 기다리던 때, ‘합격’이란 말 대신 만나는 ‘행복’에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다. 글자들은 자욱을 남길 새도 없이 눈 앞에서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나는 대개는 울면서, 때로는 분노하면서 그 문장을 움켜쥐었다. 문장 사이사이를 마치 숨통이라도 된 마냥 틀어쥐면서 그 말들의 진정성을 속으로 몇 번이나 의심하곤 했다... 2019. 3. 25.
하늘로 날아간 보라색 나비 김복동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건 지난달 말이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고, 최전선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여생을 바치며 사셨다. 당시 일본군이 어린 소녀들에 자행한 행위의 실상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분이자, 그들의 잔혹함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가 닿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전쟁 피해 여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응원을 보태셨고, 당신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나라에 2011년 대지진이 발생하자 그 누구보다 먼저 구호금을 보내신 대인이었다. 나는 먼 발치에서나마 할머니를 뵌 일이 있었다. 정대협에서 주최하는 수요집회에서였다. 20대의 나는 복수전공생이니 어찌 됐든 절반은 역사학도라는 의무감과 함께, 같은 여성으로서 겪.. 2019. 2. 2.
그 아이네 집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 속 어떤 장면. 그 장면은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아이의 집에 내가 무작정 졸래졸래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집에서 우리는 너덧 살 터울의 그 아이 동생과 함께 어색한 소꿉놀이를 했다. 가구의 위치와 벽지 색깔까지 기억날 정도로 모든 것이 제법 또렷하게 남아 있는 집. 어떤 기억은 이렇게, 오직 단 몇 컷의 단상만으로 강렬하고 맹렬히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기도 한다. - 초등학교 다니던 때 중 정말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절이 딱 두 번 있다. 열 살 때와 열두 살 때다. 학교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일 그 나이에, 교실의 모든 것은 내겐 거대한 덫과 같아 보였다. 오늘도 부디 하루가 후딱 끝나 있기를 바라며 교실문을 열기 전 매일 심호흡을 했다. 나는 그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2019.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