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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58

<쓰가루 / 석별 / 옛날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 ㅡ “왜 모험이 자랑거리가 되나요? 바보스러워라. 믿는 것입니다. 꽃이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이를테면 임시로 모험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 모험심이 없다는 것은 당신에게 믿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천박한 것입니까? 믿는 것은 사도(邪道)입니까? 아무래도 당신들 신사는 믿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다루기가 어려워요. 그것은 머리가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저속한 것입니다.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것만 생각하는 증거입니다.” (p.359, 중) ㅡ 파멸과 우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동판 중단편선이다. 책 제목에서 언급된 세 작품이 정확히, 순서마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수록돼 있다. 정직하다고 .. 2016. 8. 22.
<천국의 문>, 김경욱 그리고 그 외 : 2016 이상문학상 작품집 ​ ㅡ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가 전부 그럴듯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허구는 모두 어느 정도 사실에서 출발한다. 야구 기록원은 어릴 적 꿈이었고 법대에 진학해서 사법고시를 보라는 부모의 압력 속에 십대를 보냈으며 언젠가는 독창적인 스파이 소설을 써보리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니, 흐릿한 조명 밑에서 다리를 떨며 즉흥적으로 지어낸 삶들은 이 세계와 나란히 달려가는 어떤 세계에서 또 다른 내가 꾸려가는 인생일 수도 있었다. 평행우주이론이 뭔지는 몰라도, 무심코 내린 작은 선택으로 나를 비껴간 숱한 삶을 상상하다보면 정신이 바늘구멍을 드나들 만큼 날카롭게 집중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바늘구멍으로 다른 세상을, 이 광대한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 2016. 8. 22.
<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 그녀는 재빨리 내게로 몸을 돌리더니, 두 팔을 활짝 벌려 내 머리를 끌어안고는 뜨겁고 힘찬 키스를 퍼부었다. 그 긴 이별의 키스가 누구를 찾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그러나 나는 굶주린 듯 그 달콤한 맛에 취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09, ) 내 첫사랑은 수학책 귀퉁이에 깨알 같이 끄적인 글자들과 함께 사라졌다. 사전적 의미만 아니라면, 나는 열다섯 무렵에 첫사랑을 시작했다. 당시 수학선생님은 어떤 의미에선 조금 별난 분이셨다. 주에 한 번 꼴로, 수업 전 교과서 귀퉁이에 '지금 이 순간 피어오르는 생각'을 두세 줄 정도로 쓰라 하셨다. 그때의 나는 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의무에 수반된 이런저런 것들을 제외한 남은 생각의 공간을 모조리 '그 .. 2016. 1. 24.
옛 작가를 추억하다 『 나는 아내를 거칠게 밀치고 문득 심한 멀미를 느꼈다. 온 세상이 낡은 차가 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다시 그놈의 지긋지긋한 멀미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도피하고 굴종해야 할 것으로 느낀 게 아니라 맞서서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서 느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사람 속에 도사린 끝없는 탐욕과 악의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 옳지 못할수록 당당하게 군림하는 것들의 본질을 알아내야겠다. 그것들의 비밀인 허구와 허약을 노출시켜야겠다. 설사 그것을 알아냄으로써 인생에 절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멀미일랑 다시는 말아야겠다. 다시는 비겁하지는 말아야겠다. 』 (pp.270-271, 중) 한때는 박완서 작가를 가장 좋아했다. 입시 문제집 지문에서 지겹도록 본 것관 별개였다.. 2016.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