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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58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김경욱 ​ ㅡ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출발한 너바나의 불가사의한 상업적 성공은 밴드의 멤버들조차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당황할수록 대중적 인기는 높아만 갔다. 높이 날수록 추락에의 욕망은 강해진다. 21세기의 물질문명을 주도하는 컴퓨터 디지털 산업이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되었듯이 그 물질문명을, 탐욕스러운 기계들을 깨부수라고 울부짖는 밴드들도 차고에서 출발한다. 삶의 아이러니란 그런 것이다. (p.36, 중에서) ㅡ 유독 어느 시대가 그려지는 문장이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그저 문장만으로도 시간이 품은 공기를 물씬 풍겨대는 글이 있다. 내게는 김경욱 작가가 그런 사람이다. 그의 문장에는 90년대 말의 감성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새파란 화면의 PC통신, 어른 발바닥 만한 시티폰, 경제위기가 남기고 간 음울한.. 2016. 8. 23.
<절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존재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나와 같은 이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의뭉스런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진짜로 존재할까 싶은 묘한 호기심, 그러면서도 진짜로 존재하면 어쩌지 싶은 공포 따위의 것들. 수백 년 문학의 역사에서 '분신'이란 소재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존재로써 나를 알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 닿아있는 지점이, 바로 '분신' 모티프인 것이다. 나보코프의 은 분신에 관한 이야기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렇다. 자신과 똑 닮은 (것이라 생각하는) 이를 통한 완전범죄를 꿈꾸는 한 예술가의 심리를 현란한 언어로 그려낸 소설. 대표작 에서 여지없이 드러낸 그만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어딘.. 2016. 8. 23.
<농담>, 밀란 쿤데라 ​ ㅡ 과거의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네크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네크가 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pp.490-.. 2016. 8. 22.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ㅡ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p.34) ㅡ 같은 곳에서의 세 번째 면접.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본인은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후련함과 상실감 사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달래려 집어든 책에서 저 문장과 맞닥뜨렸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헤밍웨이의 문장은 짧고 단단하다. 한 치.. 2016.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