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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농담>, 밀란 쿤데라

by 디어샬럿 2016. 8. 22.




과거의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네크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네크가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pp.490-491)



쿤데라의 데뷔작이다. 1967년에 쓰였다. 마지막 러브레터에 부친 농담 한 줄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청년 루드비히의 고뇌와 성찰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론 쿤데라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의 저서 중 가장 '소설답기' 때문이다.

쿤데라 특유의 순환형 플롯, '무게'에 관한 고찰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구소련 공산주의의 허울뿐인 무거움을 통렬히 비판하는 그의 작가적 세계관이 <농담>에서부터 발현되고 있는 셈. 회의로 무장한 복수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루드비히가 체코의 민속춤을 보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지막 장면에선 작가 자신의 인생과 원망에 대한 성찰적 면모도 엿보인다. 작가 쿤데라가 가진 조국을 향한 깊은 애정과 채 버리지 못한 기대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쿤데라 자신을 강력하게 투영시킨 인물. 그 자신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루드비히인 탓이다.

가장 쿤데라 답지 않으면서도 가장 민낯의 쿤데라를 만날 수 있는 작품. 내용으로만 보면 쿤데라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축에 드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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