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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58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우리는 10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10년 동안의 학창시절보다도 더 단호하게 변했다. 우리는 네 권으로 된 쇼펜하우어 전집보다 잘 닦은 단추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놀라워하다가 그런 다음에는 분노한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 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이 아니라 구둣솔이 아닌가 하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 그리하여 입대한 후 3주가 지나자 제복에 은실이 달린 우편배달부의 힘이 예전의 우리 부모, 우리 교육자 그리고 플라톤에서 괴테에 이르는 모든 문화계 인사를 합친 것보다 더욱 막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젊고 깬 눈으로 우리는 우리 선생님이 말하는 고전적인 조국애 개념이 여기에서는 인격을 포기함으로써 잠.. 2015. 6. 23.
애정이란 무엇인가 :: <홍까오량 가족>, 모옌 애정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모두 자신만의 해답이 따로 있을 터이다. 그 귀신 같은 애정이란 것은 무수한 영웅과 미녀들을 시달리게 했다. 할아버지의 연애 역사와 아버지의 범람한 애정과 나 자신의 창백한 애정의 사막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 삼대의 애정에 적합한 강철 같은 규칙을 연역해보자면, 미친 듯한 애정을 구성하는 첫 요소는 바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며, 찔린 심장에서는 송진 같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리고 애정의 고통으로 인해 위장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오고, 소장과 대장을 거쳐서 기름 덩어리 같은 커다란 대변으로 만들어져 신체 외부로 배출된다. 잔혹한 애정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는 무정한 비판이며,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애를 쓴다. 생리적 리듬의 껍질과 마음의 껍.. 2015. 6. 19.
<무기여 잘 있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 “중위님, 중위님이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는 걸 잘 압니다. … 이 세상에 전쟁만큼 나쁜 건 없습니다. 앰뷸런스 부대에나 근무하는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 전혀 모르죠.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더라도 멈추도록 수를 쓸 수도 없고요. 그렇게 되면 모두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도 있어요. 장교들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전쟁이 일어나는 건 그런 작자들 때문이죠.” (p.22) --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 2015. 6. 17.
<유독>, 황인찬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 2015.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