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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5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삶에서 가장 사소한 것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체적인 모습은 대부분 그 사람에 대한 관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관념들이 그 사람의 두 뺨을 완벽하게 부풀리고, 거기에 완전히 부합하는 콧날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목소리 울림에 마치 일종의 투명한 봉투처럼 다양한 음색을 부여하며, 우리가 .. 2015. 7. 18.
<뿌리 이야기>, 김숨 “당신은 천근성 쪽일까?” 어떤 포도농장들은 포도나무들 사이사이에 민들레나 토끼풀 같은 잡풀을 심기도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포도나무가 물을 얻으려 잡풀과 경쟁하느라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천근성인 포도나무 뿌리가 태생적인 기질을 거스르고 땅속 깊이 내리면 생산량은 줄어들지만 품질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수평을 지향하는 천근성 식물과 수직을 지향하는 심근성 식물을 밀식하면 뿌리의 모양과 성장 특성이 달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경쟁하듯 키 재기를 하면서 서로를 도태시킨다는 것을, 천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영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말려 죽인다는 것을. - 김숨, --- 올해 이.. 2015. 7. 3.
<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국내에선 눈에 잘 익지 않은 이름.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케냐 태생의 저명한 작가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최근까지 꽤 다작한 듯하지만, 국내에는 번역된 판본이 손에 꼽힌다. 그나마 작가 생애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이 소설이 번역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언젠가 사 두고 모셔뒀던 걸 눈에 띈 참에 해치웠다. 아무래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명칭들과 문화에 처음에는 버벅였지만, 막상 읽으니 또 단숨에 후루룩 넘어간다. 제3세계 문학의 매력이랄까. 인공의 자극보다는 재료 본연의 생동감으로 미뢰를 일깨우는 맛이라 하면 좋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미감이라 하면, 이 작품을 설명하는 데 얼추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7년 발표된 은 응구기 와 시옹오의 대표작이다. .. 2015. 6. 23.
<소립자>, 미셸 우엘벡 --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즉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의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변화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주 드물게만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의 출현이 바로 그런 변화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일단 일어났다 하면, 이렇다 할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궁극적인 귀결에 이를 때까지 발전해 간다. 그러면서 정치·경제체제며 심미적 판단이며 사회적 위계질서를 가차없이 휩쓸어간다. 인간의 어떤 힘도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없다. 그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출현뿐이다. (pp.9-10) -- 순수한 도덕은 유일하고 보편적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무엇이 거기에 부가되지도 않는다. 순수한 도덕은 역사,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떠한 요인에.. 2015.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