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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무기여 잘 있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by 디어샬럿 2015. 6. 17.

 

 

 

 

--  “중위님, 중위님이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는 걸 잘 압니다. … 이 세상에 전쟁만큼 나쁜 건 없습니다. 앰뷸런스 부대에나 근무하는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 전혀 모르죠.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 알게 되더라도 멈추도록 수를 쓸 수도 없고요. 그렇게 되면 모두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도 있어요. 장교들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전쟁이 일어나는 건 그런 작자들 때문이죠.” (p.22)

 

 

--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는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씨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p.290)

 

 

--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나는 모닥불 위에 통나무 하나를 얹어놓은 적이 있다. 통나무에는 개미가 잔뜩 붙어 있었다. 통나무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개미들은 우글우글 기어 나와 처음에는 불이 있는 한가운데로 기어갔다. 그러다가 나무 끄트머리 쪽으로 돌아갔다. 개미 떼는 끄트머리 쪽에 잔뜩 모여 있다가 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중 몇 마리는 기어 나왔지만 몸이 불에 타서 납작해진 채로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달아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미들은 불 쪽으로 갔다가 나무 끄트머리 쪽으로 돌아가서 뜨겁지 않은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은 불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때 바로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구세주가 되어 통나무를 불 속에서 끄집어내어 개미들이 땅바닥으로 달아날 수 있는 곳으로 던져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함석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을 뿐이다. 그것도 컵을 비워 거기에 위스키를 따르고 물을 타기 위해서였다. 활활 불타고 있는 통나무에 물 한 컵을 끼얹은 것은 개미를 삶아 죽이는 일에 불과했다. (pp.496-497)

 

 

 

-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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