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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141

귀향의 밤 부산행 밤 비행기로 돌아왔다. 동서고가로를 피해 신선대 길을 내달리듯 온 덕에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적당한 습기와 특유의 짭조름한 바닷내를 머금은 공기. 반사적으로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손끝 발끝의 힘까지 쭈욱 빠져버릴 정도로 온몸이 늘어지는 편안함.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공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노랗고 발간 불빛들 탓인지 하늘은 채 검지 않았다. 점점이 박힌 불빛이 점멸하는 곤빛 밤의 항구가 달리는 차창의 사면을 쫓아왔다. 모처럼의 북항 경치가 반가워서 뜬금없게도 눈물이 났다. 곧 산까지 다닥다닥 이어진 아파트들을 보며, 드디어 부산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미학적 요소라곤 전혀 없는 성냥갑 산복주택들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이게 사람 사는 집이지! 하고, 말도 안 되는 .. 2014. 7. 24.
달을 품은 다랑쉬 자는둥 읽는둥 제주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준비 후 곧장 다랑쉬오름으로 향했다. 기생화산이라곤 해도 해발 381m. 무시할 수 없는 높이다. 간간히 흩날리는 빗방울을 조금 걱정하며, 보기보다 막상 오르니 더 만만찮은 오르막을 묵묵히 올랐다. 말만 없었다 뿐이지 땀으로 범벅이 된 채였다. 정상에 오르니, 여기가 꼭대기요 싶은 기운이 물씬 오른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데, 얼핏 공기는 파랗다. 살갗에 간질간질 닿아오는 바람이 좋아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내 공기에선 풀내음이 났다. 드문드문 그림처럼 새겨진 나무와 풀밭의 녹음은 끝이 없었다. 잿빛 아침을 건넌 제주행 비행기의 몽롱한 여독이 발 끝까지 씻기는 청명함. 적잖은 산과 언덕을 올랐지만, 이런 덴 처음이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풀은 누웠다 일어서.. 2014. 7. 24.
능소화는 잘못없다 [연합뉴스] "능소화 꽃가루가 실명 초래?"... 유해성 논란 : http://bit.ly/1r0TIhg -- 그 무렵 그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도달하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미진한 느낌은 쾌감인 동시에 공포감이기도 했다. 현금의 창은 꿈속에서는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심연이었고, 현실에서는 이 세상 비밀을 다 삼켜버린 것처럼 깊고 은밀해서 그는 울고 싶도록 지독한 소외감을 느꼈다. 마침내 사춘기였다. - 박완서, .. 2014. 7. 24.
저녁 설거지 단상 늦은 저녁을 먹었다. 보통 6시 즈음이지만 가족들이 영 늦으면 8시가 넘기도 한다. 에라 오늘은 저녁 굶는다 생각하고 안 먹으면 되는데, 다 같이 먹고 있는 밥상에서 혼자 쏙 빠지기가 그래서 ― 라는 건 솔직히 핑계다. 맛있게들 먹는 양을 보면 혀밑서부터 침이 고인다. 내 손을 거친 요리들의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국이나 찌개가 너무 짜진 않은지, 나물 간은 삼삼한지, 조림 간은 잘 배었는지... 딱 한 숟갈만, 진짜 맛만 보는 거야. 자기합리화로 시작된 수저질은 결국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서야 끝이 난다. ​ 오늘은 늦은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 양파를 곁들인 김치찌개도 맛있었고, 양파와 볶은 애호박나물도 간이 잘 들었다. 햄에도 양파를 넣어 조려 구웠고 참치에도 다진 양파를 섞어 부쳤다. 이리저리 썰.. 2014.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