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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능소화는 잘못없다

by 디어샬럿 2014. 7. 24.

 

 

 

 

[연합뉴스] "능소화 꽃가루가 실명 초래?"... 유해성 논란 :  http://bit.ly/1r0TI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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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렵 그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도달하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미진한 느낌은 쾌감인 동시에 공포감이기도 했다. 현금의 창은 꿈속에서는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심연이었고, 현실에서는 이 세상 비밀을 다 삼켜버린 것처럼 깊고 은밀해서 그는 울고 싶도록 지독한 소외감을 느꼈다. 마침내 사춘기였다.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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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의 능소화였다. 사회면 기사에서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미풍에라도 팔랑일 듯 활짝 열어젖힌 꽃잎, 당장이라도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진한 주홍빛. 이 꽃이야말로, 한 번 보면 인상이 좀체 잊히지 않는다.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단단히 붙들어 매는 자태랄까. 매일 스치는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생김새를 떠올릴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는지. 아름다움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새겨진다는 건 분명 대단한 축복이다. 이맘때의 습기만큼이나 끈적이고 숨 막히는 깊은 농염. 여름이어야만 하는 꽃이다.


  ​박완서 작가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그분의 여타 작품에 비해 그닥 기억에 남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저 문장들만큼은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다. 여느 담장에 잔뜩 흐드러진 능소화의 적빛 매혹이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펼쳐지던 느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름만으로도 벅찬 설렘이, 농밀한 향기가 전해지는 것 같은. 그 꽃만큼이나 속이 울렁이는 강렬한 문장이었다. 본 적 없는 줄 알았던 능소화를 좋아하게 된 건 그때부터다. 기억에도 없던 꽃이었다.

 

  사흘 전이다. 16년 지기 I와 ​연락하다 우연히 이 꽃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이 능소화 철이라던데. 그래? 난 본 적이 없어. 친구는 의아한 듯 말했다. 중학교 가던 골목길 담벼락에 있던 주황색 꽃들이 그거잖아. 맙소사, 그제야 기억났다. 회백색 시멘트 담장에 늘어지듯 매달려 있던 그 꽃들. 흐릿한 담흑빛 화면에 유일하게 빛나던 색감 같던 그 꽃이 능소화였다니. 그러고 보니 사진이 어딘지 많이 익숙했더랬다. 1학기 기말고사 즈음마다 야속하게도 피어올랐으니, 지금보다 조금 앞선 때가 철이려니 싶다. 온몸을 열어 새아침의 열기를 고스란히 견디던 눈부신 주홍. 그렇게나 자주 보던 꽃이었는데, 뭐가 그리 채워넣을 게 많아 그걸 다 잊고 지냈는지.

 

  ​능소화는 투명했던 여름을 물들인 주홍빛 기억으로 다시 돌아왔다. 때론 하늬바람을 봉오리째 흔들어 맞을 줄도 알던 생생한 모습으로. 생각만으로도 갑갑해지는 묵직한 여름공기도, 그 꽃 특유의 농염함으로 애써 덧칠하니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내겐 이토록 온통 아름다울 뿐인데, 어깨너머만 듣고선 다 뽑아야 한다느니 이런 걸 왜 심느냐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었을 줄이야. 결국은 과장된 정보로 귀결되는 모양새지만 마음이 안 좋다. 이 아름다움에 빚진 게 얼만데. 제 한 몸 보호한다는 게 고작 울퉁불퉁한 꽃가루라는데, 그 정도도 허락해주지 못하는 척박한 가슴을 탓해얄까. 나를 다치게 하는 생명이라면 무조건 죽여버려야 한다는, 인간만능주의를 넘어선 자아만능주의에 살짝 소름이 끼쳤다. 과연 아이들이 뭘 얼마나 배울까. 생명은 소중하니 함부로 꺾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먼저 아닌가. 가시에 손 찔린다고 장미밭도 죄다 밀어버릴 기세다. 보기 좋다고 심을 땐 언제고. 안 꺾고 안 만지면 될 것을. 우리는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지.

 

 

(201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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