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일상100

호언장담의 유통기한 특별할 것 없는 휴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곧 비를 흩뿌릴 하늘을 아슬아슬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여차 했으면 흠씬 두들겨맞은 생쥐 꼴이 될 뻔했다. 혹시나 싶어 켠 TV에선 네덜란드와 코스타리카의 연장전이 한창이었다. 어젯밤 동생은 코스타리카의 승리에 내기를 걸었다. 네덜란드의 낙승을 장담했던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바로도 나바로지만, 다리에 쥐가 나도록 공을 쫓아가는 이름 모를 코스타리카 선수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체력이 떨어져 잔디에 푹푹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달리고 또 달리던 10명의 선수들. 정말이지 채널을 돌리기마저 미안한 투혼이었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들이 무안해졌다. 비틀즈의 페퍼상사와 애비로드 앨범.. 2014. 7. 24.
시간을 달리는 편지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이 편지를 보냈다. 개구진 듯 맑은 눈이 인상적인 말리 소년 카림과, 벌써부터 미인의 기미가 보이는 네팔 소녀 루마다. 단체에서 조율한 건지 성별이 다른 두 아이와 결연이 됐다. 신기하게도 동갑내기. 사는 지역은 전혀 다르지만 소식지가 따로 온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이들 편지가 단체에서 먼저 취합돼 후원자에게 보내지는 탓일 터다. 카림과는 3년, 루마와는 2년 반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어설픈 영어로 주고받은 편지도 어느덧 예닐곱 통. 또래임에도 상반된 성격이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같은 아이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다. 아마 남녀의 차이라는 부분도 있을 거다. 느낌이 완전히 다른 편지가 같은 우편에 묶여 올 때마다, 명도도 채도도 정반대인 두 색이 기묘하.. 2014. 7. 24.
살리에리와 나를 위한 변명 안부인사를 건네받으면 기분이 좋다. 나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타인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설령 대화를 위한 인사래도, 그건 그 나름대로 고맙다. "안녕"보다 한결 보드라워 당장이라도 포근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럭저럭 지낸답니다. 어찌 지내세요? 되묻다보면 나 역시 그가 새삼 궁금하다. 정말 잘 지냈는지, 밥은 잘 챙겨먹는지, 별일은 없는지. 하지만 달갑잖은 때도 있기 마련이다. 궁금한 건 따로 있단 게 한눈에도 보이는, 혹은 일장연설을 위한 전초전으로서의 허울뿐인 안부인사 같은 것들. 적잖이 받아왔어도 역시 불편하다. 관심의 대상이 나의 신상을 둘러싼 이야깃거리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땐 더 그렇다. 어딘지 날이 선 듯도 같고, 구설거리를 찾으려는 것도 같은. 받는 이의 곤란함을 의도적으로 .. 2014. 7. 24.
육개장이 뭐라고 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곤 급히 저녁준비를 했다. 아침에 산 두부를 조리고, 잠자고 있던 애호박도 깨워 새우젓에 후루룩 볶았다. 번갯불에 굽듯 햄도 부치고 달걀도 후딱 말고 있는 반찬 몇 개 내니 얼추 모양새는 갖춰졌는데... 역시 한국인인지라 국이 없으니 허전하다. 마땅한 걸 찾다 냉장고 귀퉁이서 오늘내일 하던 콩나물을 발견. 양지머리를 사다가 육개장(경상도식 쇠고기국)까지 끓이고 나니, 그제야 뭔가 저녁밥상 같다. 국은 의외의 부분에서 신경이 쓰인다. 육개장만 해도 그렇다. 고추씨를 기름에 볶아 걸러내 고추기름을 짜는 과정도, 핏물 잘 닦은 양지머리를 적당히 삶아 우리는 과정도, 좀 번거롭긴 해도 별 건 아니다. 복병은 불이다. 이런저런 레시피에선 불에만 올려두면 다 끝난 것처럼 주부(!)를 독려하지만.. 2014.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