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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육개장이 뭐라고

by 디어샬럿 2014. 7. 24.

 

 


 

 

 

 

  텅 빈 냉장고를 떠올리곤 급히 저녁준비를 했다. 아침에 산 두부를 조리고, 잠자고 있던 애호박도 깨워 새우젓에 후루룩 볶았다. 번갯불에 굽듯 햄도 부치고 달걀도 후딱 말고 있는 반찬 몇 개 내니 얼추 모양새는 갖춰졌는데... 역시 한국인인지라 국이 없으니 허전하다. 마땅한 걸 찾다 냉장고 귀퉁이서 오늘내일 하던 콩나물을 발견. 양지머리를 사다가 육개장(경상도식 쇠고기국)까지 끓이고 나니, 그제야 뭔가 저녁밥상 같다.

  국은 의외의 부분에서 신경이 쓰인다. 육개장만 해도 그렇다. 고추씨를 기름에 볶아 걸러내 고추기름을 짜는 과정도, 핏물 잘 닦은 양지머리를 적당히 삶아 우리는 과정도, 좀 번거롭긴 해도 별 건 아니다. 복병은 불이다. 이런저런 레시피에선 불에만 올려두면 다 끝난 것처럼 주부(!)를 독려하지만 진짜는 여기부터. 시간차 불조절이 필수다. 끓는 소리며 냄새에 따라 시시때때로 불을 조절해야 한다. 보통은 센불로 시작했다 물이 끓으면 중불, 가만히 두었다가 끄기 직전 센불의 패턴. 센불로 계속 두면 재료는 설익고 간은 안 배는데 국물만 졸고, 줄곧 약불로는 재료가 퍼진다. 중불로 두는 동안에도 상황에 따라 열조절이 들어간다. 차라리 탕이라면 한 번 불에 올려두고선 몇 십 분이고 가만히 지나면 될 일. 국은 일단 불 위에 있는 동안은 보글보글 가열되는 이 냄비의 미세한 변화에 어떻게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이를테면 '불놀음'이다. 그래선지 국 끓일 때마다, 도통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디선가 봤던 말이 떠오른다. "사람도 사랑도 불조절을 잘해야 혀 이 가시내야!"였던가. 빈대떡 장사를 하는 엄마가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딸의 등짝을 후려치며 내뱉은 대사였다. 처음엔 센불로 머시매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 거여. 그라고선 불을 살짝 줄여서 뜨뜻미지근하게 조심조심 애정을 주면서 달아오르게 하는 거제. 아 요것이 이제 다 됐다, 싶으면 그때 불을 다시 확 올려불고 완전히 니 껄로 만드는 거야! 낯이 꽤 익은 중년 여배우의 앙칼진 일갈에 딴엔 '빈대떡 철학'이라며 제법 감탄했더랬다. 

  국의 불놀음은 거기에 미세한 관찰이 덧붙는다. 아마도 애정이란 것도 이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서로가 서로의 사람임을 인지 혹은 확신하게 되는 순간부터가 아닌가 한다. 혹자 혹은 상당수의 누군가가 안심하게 되는 그 지점 말이다. 단순히 지켜보기만 해서도, 그렇다고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불을 올려가며 고유의 맛을 날려버려서도 안 될 바로 그 단계. 금방 타 올라 졸아버리지도 너무 느슨해져버리지도 않게 유지할 줄 아는 '적정선'. 상대와 상황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배려할 줄 아는 관심. 때로는 내 안의 가장 고집스런 무언가를 포기하기도 하며 서로가 녹아들 수 있게 기다릴 줄도 아는 인내, 혹은 인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애정이란 아마도 이 모든 걸 필요로 하는 복합감정체일 터다.

  한때는 주체하지 못했고 때로는 머뭇거렸고 어떤 땐 기다리지 못해 보낸 사람, 사람, 사람... 나는, 종류도 얼마 안 되는 탕 같은 사람을 기다리다 정작 무수한 진국을 놓쳐온 건 아니었는지. 뭐든 그리 대단할 것도 없고, 뭐든 대단할 수 있는데. 욕심이 많았던 걸까 게을렀던 걸까. 어쩌면 이기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지나간 인연들엔 실망이나 분노보다, 상대가 모든 걸 해주길 바랐던 내 애정의 모순에 하릴없는 미안함을 느낀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몰랐으니까. 그래서 지금의 인연들이 고맙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수많은 타인들에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모처럼의 자동기술형 일기. 육개장이 뭐라고 이렇게 주절주절 실없는 소릴 써 댄 건지 모르겠네. 간만에 듣는 우리 경화언니 젊었을 적 사라사테 바스크 기상곡. 젊은 정경화의 영상으론 파가니니 소나타가 제격인데 소스 지원이 안 된다. 더듬더듬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




(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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