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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시간을 달리는 편지

by 디어샬럿 2014. 7. 24.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이 편지를 보냈다. 개구진 듯 맑은 눈이 인상적인 말리 소년 카림과, 벌써부터 미인의 기미가 보이는 네팔 소녀 루마다. 단체에서 조율한 건지 성별이 다른 두 아이와 결연이 됐다. 신기하게도 동갑내기. 사는 지역은 전혀 다르지만 소식지가 따로 온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이들 편지가 단체에서 먼저 취합돼 후원자에게 보내지는 탓일 터다.

  카림과는 3년, 루마와는 2년 반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어설픈 영어로 주고받은 편지도 어느덧 예닐곱 통. 또래임에도 상반된 성격이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같은 아이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싶다. 아마 남녀의 차이라는 부분도 있을 거다. 느낌이 완전히 다른 편지가 같은 우편에 묶여 올 때마다, 명도도 채도도 정반대인 두 색이 기묘하게 배합된 캔버스 같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난다.

  카림에게선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소년의 풋내가 난다. 대여섯 단어 이상의 문장을 좀체 쓰지 않는데, 그 짧은 글조차도 대개는 형식적이다. 요즘은 우기입니다, 우리 가족은 잘 지냅니다, 저는 읽기와 수학을 좋아합니다 같은 것들. 오는 편지마다 좋아하는 과목과 장래희망이 바뀌는 탓에, 시간차가 나는 내 서신이 겸연쩍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좋아하는 것도 꿈도 많은 딱 그 나이대 아이.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다. 단문 속에서도 축구 이야기만은 언제나 유난스런 길이감을 자랑한다. 자기뿐 아니라 말리의 모든 사람들이 축구에 관심이 많다고, 축구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첫 답장을 보냈던 편지에 한 마디 적어보낸 적도 있다. 방과 후 친구들과 공을 차는 시간이 제일 좋다는 11살 소년. 서신 교환 기간이 조금 더 짧았다면 아마 이번 편지의 팔할은 월드컵 이야기였을 거다 ―서신 교환엔 보통 넉 달이 걸린다―.

  루마의 편지는 잔잔한 편이다. 조곤조곤하고 얌전한 말투와 조용한 미소를 지닌, 낯가리는 소녀의 느낌. 처음엔 일과보고 비슷한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몇 통의 편지가 오고간 뒤부턴 조금씩 이런저런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며칠 전 동생과 다툰 후로 여태 말을 하지 않고 있다든지, 요즘 학교에서 배우는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다든지 하는 등등. 4개월의 간극 탓에 먼 산의 메아리 같은 대화가 되어버리고 말지만, 여자아이라 그런지 편지만으로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느낌이다. 참, 루마의 편지에는 항상 예쁜 그림도 온다. 결 고운 색연필로 하나하나 색을 채워넣어 정교하게 그려주는데, 대개는 수수한 들꽃류다. 이번 편지에선 잎 색이 모두 다른 연꽃을 그려 보냈다. 섬세한 선에 고운 색감이 2차원 종이 위에서 움직이듯 너울거리는데 실력이 제법이다. 본인 역시 그림 그리기나 자수 놓는 일이 제일 좋단다. 소질도 소질이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 예쁘고 고맙다. 어느 쪽이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답장을 쓰지 않을까 싶다. 받아드는 아이들에겐 두 달 전의 과거겠지만, 신경 쓰지 않고 요즘의 나를 써 보낼 생각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갈 두 달 뒤의 물리적인 나는 지금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길 바라며. 뭘 쓸까. 언니/누나가 요즘 매일 일기쓰기를 실천하고 있단다, 마치 너희 나이로 돌아간 기분이야, 이런 거면 아이들이 공감 좀 해주려나. 혹은, 설마 어른이 돼서도 일기를 써야하는 거냐며 좌절할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태양처럼 빛을 뿜으며 내게로 온, 사그라지지 않을 끝없는 사랑이
   저 우주를 건너와 날 부르네. 끊임없이...
   선구자여, 진정한 깨달음을 주소서(Jai guru deva om).
   그 무엇도 나의 세상을 바꿀 순 없어"

 

 

 

  후기 비틀즈의 세계관이 압축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Across The Universe. 출시된 시간상 네 사람의 마지막 앨범이었던 Let It Be에 수록돼 있다. 처음엔 별 감흥 없어도, 들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앨범이다. 수작 중에 수작.



(201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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