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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호언장담의 유통기한

by 디어샬럿 2014. 7. 24.

 

 

 

 

 

 

 

  특별할 것 없는 휴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곧 비를 흩뿌릴 하늘을 아슬아슬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여차 했으면 흠씬 두들겨맞은 생쥐 꼴이 될 뻔했다.

  혹시나 싶어 켠 TV에선 네덜란드와 코스타리카의 연장전이 한창이었다. 어젯밤 동생은 코스타리카의 승리에 내기를 걸었다. 네덜란드의 낙승을 장담했던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바로도 나바로지만, 다리에 쥐가 나도록 공을 쫓아가는 이름 모를 코스타리카 선수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체력이 떨어져 잔디에 푹푹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달리고 또 달리던 10명의 선수들. 정말이지 채널을 돌리기마저 미안한 투혼이었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들이 무안해졌다.

  비틀즈의 페퍼상사와 애비로드 앨범을 차례로 꺼내 들으며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다, 점심 즈음엔 엄마와 김치를 담갔다. 식구들이 집밥에 집착(?)하는 타입이어서 김치가 금세 동이 난다. 여름 배추는 단단치 못해 맛이 훨씬 떨어지는 것도 알지만, 사 먹는 건 가격도 비싸고 우리 입맛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 미리 절인 배추에 양념을 쓱쓱 버무리는데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김치는 금세 색도 맛도 예쁘게 들었다. 한동안 허전했던 밥상인데 잘됐다 싶다. 어려선 김치 없이 밥 못 먹는단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이 들면 이해하게 된단 말에 난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어린 주제에 건방지게도 장담했었다. 그때였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김치 없는 밥상을 허전하게 생각하게 될 줄은. 그리고...

  20대 초반을 감히 바쳐 경주마처럼 몰두했던 '단 하나의 목표'가 아무렇지도 않게 '또 다른 목표'로 대체됐고, 대학 전공 이외에는 절대 생업을 찾는 일이 없을 거라던 장담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절대 들을 일 없을 거라던 장르의 음악에 매일 귀를 맡기고, 평생 가까이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분야의 책을 한 자 한 자 아까워 곱씹어 읽는다. 결코 친해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 이와 밤새 이야기를 하고, 내 타입과 정반대라고 극구 부인하던 사람을 여태의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이제 와 보니 확신이나 장담 같은 건 면포 한 장만큼이나 보잘 것 없이 얇고 성글 뿐이었다. 이런저런 바람에 대책없이 휘날리고 나풀대고 휘둘리다 결국 어느 기류에 휩쓸려 간 곳도 모르게 된 것이다. 나는, 어릴 적 확신하던 미래와는 꽤나 다른 거리만큼 어찌어찌하여 왔다. 이 세상엔 장담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심지어는 나조차 타의 아닌 자의로서도 확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시간이 쌓일수록 지금 이상으로 한층 뼈아프게 느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갓 지은 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잠깐 눈이나 붙여야지 싶었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자 버렸다. 종일 흐렸던 하늘은 어느덧 구름조차 자취를 감췄고 TV는 물 만난 듯 시끌벅적해졌다. 낮잠 잔 후의 찌뿌둥한 느낌은 역시 별로다. 게다가 오늘밤은 비 때문에 조깅도 나가지 못했다. 조깅을 못 나가는 날은 하루종일 몸이 무겁다. 다행히 내일 저녁은 잠깐 비가 그친다는데, 장마가 걱정이다. 어디 헬스장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그러고 보면 나는 심장이 터져나갈 듯한 고통이 싫어 뛰는 것에도 정말 몸서리를 쳤는데.

  노트북을 켜고 화이트 앨범을 재생시키며, 정말 하루 일과와 순간의 단상에 충실한 일기를 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비틀즈 앨범만 석 장 째다. I Will에 이어지는 Julia까지, 이 앨범엔 어쩜 이런 노래들이 담겨있을까. 김치가 없어서 밥을 못 먹는 일 따윈 없을 테고, 뛰면서 희열을 느낀다는 건 평생 내 경험 영역의 밖일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나는, 비틀즈 노래를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될 날이 올 줄도 전혀 몰랐다. 호언장담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어디에도 흡수될 수 없는 기한을 넘긴 상한 말들이 어느 허공을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어른이란 이렇게 조금씩 내뱉을 용기를 잃어가나 보다.

​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옳은 것을 향한 지금만큼의 믿음과,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확신. 내게 남았다면 남았을 이 작은 용기만은 언제까지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4.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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