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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19

어느 탐나는 기록,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 4년 전 겨울은 엉망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세차게 흔드는 초조감에 겨우 익숙해지나 싶었을 무렵이었다. 해의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짙은 불안이 바싹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예고 없이 불쑥대는 불안에 발을 종종거렸다. 나는 불확실한 것에 면역이 되어 있지 못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인간의 틈을 손 쉽게 파고드는 법이다. 어느새 불안감은 내 발치에 그림자처럼 매달렸다. 초조와 불안이 빚어낸 나의 그림자는, 해가 없는 저녁이면 외려 더욱 축축하게 드리워왔다. 나는 까닭 모를 한기에 몇 번이나 몸을 움츠렸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수시로 찾아왔다. 날이 밝을 때까지 책을 읽었다. 억지로 청한다고 올 잠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혹 느닷없이 의식.. 2016. 8. 26.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김경욱 ​ ㅡ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출발한 너바나의 불가사의한 상업적 성공은 밴드의 멤버들조차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당황할수록 대중적 인기는 높아만 갔다. 높이 날수록 추락에의 욕망은 강해진다. 21세기의 물질문명을 주도하는 컴퓨터 디지털 산업이 허름한 차고에서 시작되었듯이 그 물질문명을, 탐욕스러운 기계들을 깨부수라고 울부짖는 밴드들도 차고에서 출발한다. 삶의 아이러니란 그런 것이다. (p.36, 중에서) ㅡ 유독 어느 시대가 그려지는 문장이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그저 문장만으로도 시간이 품은 공기를 물씬 풍겨대는 글이 있다. 내게는 김경욱 작가가 그런 사람이다. 그의 문장에는 90년대 말의 감성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새파란 화면의 PC통신, 어른 발바닥 만한 시티폰, 경제위기가 남기고 간 음울한.. 2016. 8. 23.
<사람의 아들>, 이문열 ​ ㅡ 그때는 먼저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 살아 움직이는 독선의 말(씀)부터 이 땅에서 내쫓아야 한다. 그의 독기 서린 입김이 너희 순진한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훼의 누룩이 이곳에서 뜨는 것을 막아야 한다. 너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대지와 인간들을 지켜야 한다. 어쩌면 그 거짓 ‘사람의 아들’은 자질구레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숨겨왔을지도 모르고, 남달리 길고 미끄러운 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저 한 무력한 사람의 아들로 그와 싸워야겠지만, 그래도 이 대지의 인간들은 언제나 네 편에 있음을 잊지 마라. 보다 높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너의 동류(同類)를 위해 네 힘을 다 쏟고, 멀리 하늘에 있는 왕국이 아니라 너희가 발 딛고 선 대지를 위해 네 슬기를 다 펼쳐라. (p.3.. 2016. 8. 22.
<천국의 문>, 김경욱 그리고 그 외 : 2016 이상문학상 작품집 ​ ㅡ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가 전부 그럴듯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허구는 모두 어느 정도 사실에서 출발한다. 야구 기록원은 어릴 적 꿈이었고 법대에 진학해서 사법고시를 보라는 부모의 압력 속에 십대를 보냈으며 언젠가는 독창적인 스파이 소설을 써보리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니, 흐릿한 조명 밑에서 다리를 떨며 즉흥적으로 지어낸 삶들은 이 세계와 나란히 달려가는 어떤 세계에서 또 다른 내가 꾸려가는 인생일 수도 있었다. 평행우주이론이 뭔지는 몰라도, 무심코 내린 작은 선택으로 나를 비껴간 숱한 삶을 상상하다보면 정신이 바늘구멍을 드나들 만큼 날카롭게 집중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바늘구멍으로 다른 세상을, 이 광대한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 2016.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