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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19

개와 늑대의 시간 ::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벌써 땅거미가 지는군. 영빈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말하곤 했다. 그러면 현금은 아니야, 지금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맞받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게 만날 만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2015. 7. 18.
<먼지의 방>, 김승옥 “고등학생 시절에 장래 직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습니다. 그때 정치가가 된다면 하고, 제가 우리나라 정치가가 됐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상상해봤습니다. … 간단히 말씀드리면 부국강병 정책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른 가치라기보다 우리가 그래도 약소국가라는 한계를 느낍니다. 부국강병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멍청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똑같은 비율로 부국강병 경쟁을 한다면 국민들은 영원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는 항상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을 거고 그래서 막상 전쟁이라도 터지면 우리보다 강대한 나라에 우리는 전멸합니다.” … “내 생각으로는 자네 생각에 크게 두 가지 잘못이 있어. 첫째는 정치의 목적은 부국강병이 아.. 2015. 7. 18.
<목포행>, 이청준 언젠가 한 친구와 술이 몹시 취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친구 주정 삼아 저더러 왜 요즘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시빌 걸어오더군요. 전 그저 평소 느낌대로 글이 잘 씌어지지 않아 그런다 했더니, 그 친구 대뜸 저더러 그새 겉늙은이가 다 됐다고, 겉늙은이처럼 고고한 소리 말라고 다시 시비예요. 공연히 세상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개인의 삶인데 쓸데없이 너무 세상사에 휩쓸려 같잖은 소명감이나 비분강개 속에 자기 인생까지 허망하게 늙혀버리지 말라구요. 그러면서 그는 아주 의기양양했어요. 자기에겐 이 세상이라는 게 뜻밖에 수월하더라구요. 세상살이는 그저 쉽게 쉽게 살아 넘어가야 한다구요. 전 그 친구에게 짐짓 한번 대들어 봤지요.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구석은 .. 2015. 7. 18.
<뿌리 이야기>, 김숨 “당신은 천근성 쪽일까?” 어떤 포도농장들은 포도나무들 사이사이에 민들레나 토끼풀 같은 잡풀을 심기도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포도나무가 물을 얻으려 잡풀과 경쟁하느라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천근성인 포도나무 뿌리가 태생적인 기질을 거스르고 땅속 깊이 내리면 생산량은 줄어들지만 품질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수평을 지향하는 천근성 식물과 수직을 지향하는 심근성 식물을 밀식하면 뿌리의 모양과 성장 특성이 달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경쟁하듯 키 재기를 하면서 서로를 도태시킨다는 것을, 천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영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말려 죽인다는 것을. - 김숨, --- 올해 이.. 2015.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