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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47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린다. …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로 들어보이곤 했다. …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 2015. 8. 28.
Noon ::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Doris Lee, 'Noon') 1월은 눅눅하고 따뜻했다. 2월에는 날씨에 속은 개나리가 꽃을 피웠다. 마을 사람들도 이런 날씨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는 계속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녀의 생일에는 이미 언급했던, 암사슴을 연상시키는 정말 예쁜 자전거와 더불어 『현대미국회화사』를 선물했다. … 그러나 그림에 대한 심미안을 키워주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도리스 리의 그림을 보더니 건초 위에서 낮잠을 자는 남자가 전경에 그려진, 짐짓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는 말괄량이의 아버지냐고 물었고, 내가 그랜트 우드와 피터 허드는 훌륭하지만 레지널드 마시와 프레더릭 워는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p.318)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2015. 8. 27.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기억의 작동, 어쩌면 그것은 욕망의 시작이며 어린 시절의 끝인지도 몰랐다. 기억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하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고 결국 나이가 들어가면서 희미해지는 갈망이라고나 할까. 』(p.100)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은 묘했다. 공기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무언가 몽글몽글 그려지기 시작한 건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우울한 사춘기의 기록. 가만히 떠올린 이 책을 향한 인상은 그랬다. 책장마다 스민 불안이 한낮에 흐르다 식은 땀처럼 끈적끈적 눌러붙어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파동이, 책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소설은 한 소녀의 성장기에 가깝다. 그다지 유난스러울 것 없는 사춘기.. 2015. 7. 28.
<멀베이니 가족>, 조이스 캐럴 오츠 다도(茶道)에서 잘 우린 차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몇 번을, 얼마나 우려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번째로, 1분 30초 가량 우려낸 차가 가장 이상적이다. 첫물은 향은 진할지언정 맛이 텁텁하고, 세 번째에 이르면 맛과 향이 약해져 차의 느낌이 덜해진다. 적절한 횟수, 적당한 시간을 지킨 차야만이 제 풍미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셈이다. 문학에서 '가족' 소재를 굳이 비교하자면 차를 우려내는 작업과 같다. 흔한 만큼 신중해야 한다. 설익은 이야기는 이도저도 아닌 길로 흐르기 쉽고, 과용하면 딱 클리셰 되기 좋다. 그러나 이상적인 영역에만 들어온다면, 가족 이야기만큼 수용자의 마음을 쉽게 끌어당기는 주제도 없다. 최고의 문학작품 중 하나라 칭송되는 역시 엄밀히 말하면 가족 이야기다. 이 .. 2015.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