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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멀베이니 가족>, 조이스 캐럴 오츠

by 디어샬럿 2015. 7. 25.

 

 

 

 

  다도(茶道)에서 잘 우린 차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몇 번을, 얼마나 우려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번째로, 1분 30초 가량 우려낸 차가 가장 이상적이다. 첫물은 향은 진할지언정 맛이 텁텁하고, 세 번째에 이르면 맛과 향이 약해져 차의 느낌이 덜해진다. 적절한 횟수, 적당한 시간을 지킨 차야만이 제 풍미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셈이다.

 

  문학에서 '가족' 소재를 굳이 비교하자면 차를 우려내는 작업과 같다. 흔한 만큼 신중해야 한다. 설익은 이야기는 이도저도 아닌 길로 흐르기 쉽고, 과용하면 딱 클리셰 되기 좋다. 그러나 이상적인 영역에만 들어온다면, 가족 이야기만큼 수용자의 마음을 쉽게 끌어당기는 주제도 없다. 최고의 문학작품 중 하나라 칭송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역시 엄밀히 말하면 가족 이야기다. 이 작품이 그만큼 장엄하단 말은 아니다. 그러나 뭉클한 감동만은 적잖이 느낄 수 있는 작품임엔 분명하다. 가족이야말로, 모두와 모든 것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삶은 너무도 가깝게, 우리의 코앞에 있다. 그것은 패러독스였다. 뒤틀리고 복잡한 문제였다.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물론 우리는 그런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삶에서 분리되어 거리를 두는 것이다. 기억이란 걸 하려면 먼저 그 기억의 근원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pp.409-410)

 

 

  <We Were The Mulvaneys>가 이 책의 원제이다. 책의 가장 첫 문장도 원제에 충실하다. "우리는 멀베이니 가족이었다." 멀베이니 가는 1970년대 미국의 전형적이고도 이상적인 가정상을 대변한다. 혈혈단신으로 마운트 이프리엄에 입성해 지붕회사의 사장이자 지역의 유력인사가 된 마이클 멀베이니와 그의 아내 코린, 슬하의 3남1녀 ― 마이크 주니어, 패트릭, 매리앤, 저드 ― 가 이 '표본 가정'의 주연들이다. 책은 가족 중 막내 저드의 시선을 빌려 멀베이니 가의 파란만장한 20년을 그려내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고 더없이 화목했던 하이포인트 농장의 멀베이니 네. 그러나 타고난 미모와 선량한 성품을 지닌, 가족의 자랑이었던 매리앤이 학교 상급생인 재커리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부터 가족이라는 벽에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마이클은 딸의 처량한 모습을 외면하고, 코린은 남편을 위해 매리앤을 내보낸다. 다른 형제들도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하이포인트 저택은 고립과 고독으로 황량해져 간다.

 

  단란했던 가정이 해체를 맞은 후 서사의 포커스는 크게 두 인물에 맞춰지는 양상이다. 둘째인 패트릭과 피해의 당사자인 매리앤이 그 주인공이다. 이 중에서도 패트릭이라는 인물이 상당히 흥미롭다. PJ(패트릭의 애칭)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물이다. 멀베이니 네가 화목한 가정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시점에서도, 그는 때때로 근처에 텐트를 치고 홀로 사색하는 시간을 보낼 정도로 유난스런 독립심을 보여준다. 그의 성정은 곧 특출난 과학적 재능으로 이어진다. 명석한 두뇌로 마을의 수재로 꼽혔으며 좋은 성적으로 명문대에 진학했다. 그가 특히 관심을 보인 분야는 다름아닌 진화론. 다윈의 <종의 기원>은 청년 패트릭의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 집을 떠난 후 그는 병적이리만치 연구에 몰두한다.

 

 

--  패트릭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충격과 당혹감에 젖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그는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아름다움은 관점의 문제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 편견이다. 인간의 눈과 뇌, 언어의 작용이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름다움은 위안을 준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p.386)

 

 

  패트릭이 그토록 과학과 진화론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이렇다 할 연결고리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패트릭의 말에서, 그의 관심이 단순히 학문적인 부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문장 곳곳에서 읽히는 패트릭의 분노가 그것이다. '그 일'은 분명 누구의 잘못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매리앤이 쫓기듯 집을 떠났고, 가족이 흩어졌다. 패트릭은 마치 누군가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귀결돼 버린 상황에 좌절했다. 동시에 PJ는 마이클의 외면과 코린의 결정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 결정은, 패트릭의 관점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실망은 고요했지만 깊게 응축돼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인간에 대한 배신이, 그를 그토록 과학에 몰두케 한 것이다.

 

  패트릭은 종종 진화론을 빗대며 인간의 무력함을 피로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인간 스스로의 자만과 달리 다른 생물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다. 인간 역시 자연의 정교한 선택의 매커니즘의 산물일 뿐이므로, 자연에 군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일단 태생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만큼 완벽하지 못하다. 신체 구조상으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의 자랑이라는 지성 체계 역시 피차일반이다. 패트릭의 관점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대변하는 예는 스스로의 잔학성이다. 인간이 정말로 완벽했다면, 수많은 삶이 이유 없이 희생되지는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 패트릭의 생각이다. 인류를 대하는 패트릭의 태도에는 은연중에 가족을 향한 원망이 서려 있다.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쫓겨나다시피 한 매리앤을 향한 동정과, 그런 결정을 단행한 가족에의 분노가 드러나는 것이다. 

 

 

--  "참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과학이 이토록 많은 것을 밝혀낸 오늘날까지도 인간이란 종족은 왜 이렇게 무지한지. 왜 이렇게 미신적이고 잔인한지. 생각해봐. 나찌는 천육백만 명의 어른과 아이를 학살했고 스탈린은 이천만 명, 중국 공산당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그보다 더 많이 죽였어. 20세기만 따져도 그래. 그게 다 우리의 문명화된 세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수수께끼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왜 이렇게 비열하고 지독한지야." (pp.399-400)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가족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이 점 역시 패트릭의 진화론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여러모로 이 인물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이반 표트르비치와 상당한 유사점을 지닌다. 그 역시 냉정함에 가까우리만치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이자 무신론자다. 게다가 가족의 일보다는 자신의 신념이나 학문적 관심이 우위에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평화를 위해 어떤 의미로든 자신을 희생한 이는 이반이었다. 패트릭 역시 과학의 사명이자 가족의 이름으로 재커리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그의 방향성도, 결국은 가족이라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악마와는 별도로 악의 존재는 믿을 수가 있지. 사탄은 없지만 악은 존재한다는 뜻이야. 악은 자연에 반하는 탐욕, 미신, 어리석음처럼 하나의 성향으로 우리 종의 유전자에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자기 안의 악을 활성화시키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고.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p.485)

 

-- “그날 이후 그 모든 게 내게서 빠져나갔어. 피에서 독이 빠져나가듯. 사실은 내가 병에 걸려 아팠던 건데 독이 빠져나갈 때까지 몰랐던 것처럼. 하지만 난 그걸 후회하지 않아. 복수는 분명 좋은 거니까. 옛날 그리스인들은 그걸 알았지. 피가 피를 부른다는 걸. 내 생각에 ‘정의’에 대한 본능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 균형을 회복하려는 욕구.” (p.795)

 

 

  반면 매리앤이라는 인물은 대표적인 '선'의 상징이다. 가족을 원망하기는커녕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간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비견해보면 막내 알렉세이와 비슷한 위치로 보인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알렉세이보다는 좀 더 다층적이고 '인간적'이다. 어리숙할 정도로 순진한 성품 때문에, 그녀의 선의를 노리고 곡해하는 이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의를 성숙시키고 모든 것을 용서해 나간다. 선의 중심에는 항상 가족이 있다. 그녀는 마음 한 켠에 항상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을 그린다. 그녀에게 있어 하이포인트 농장과 가족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울타리다. 오직 가족이기 때문에 돌아가야만 한다는 매리앤의 귀소 본능은, 너무나 순수하기 그지없어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책 중후반에 이르러 하이포인트 농장에 몰래 찾아온 매리앤이 오열하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로 꼽힌다.

 

 

--  패트릭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 나는 집을 떠나자마자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깨달았어.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을 재배치하기만 하면 되지. 어디 있는가는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우리는 계속 움직이는 거야." … "난 오빠랑 다른 것 같아. … 일시적이란 생각은 안 들어. 내가 떠난다고 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장소도, 사람들도." (pp.389-390)

 

 

  그리고 멀베이니는 모였다. 20년 만이었다. 돌고 돌아왔다는 표현이 이토록 어울릴 수가 없다. 패트릭은 가책이 남지 않을 만큼 복수에 성공했고, 마이클 멀베이니는 임종 직전 매리앤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이크 주니어와 매리앤은 물론, 진화론 외엔 모든 것에 냉소적이었던 패트릭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이포인트를 찾는다. 함께 한 시간보다 더 오랜 동안 서로를 외면하며 지냈던 과거를 상기하면 용서와 만남은 어딘지 급작스러운 데가 있다. 그럼에도 가족이 오랜만에 모인 모습은 강한 울림을 준다. 해체와 오랜 고립 후 다시 만난 한 가족의 서사가 이토록 극적으로 다가오는 건, 우리 누구나가 작건 크건 한 번 쯤은 그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늘어난 가족이 야구팀을 짜 서로 경기하는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며, 모든 것이 꿈 같아 어리둥절하다는 매리앤에게 저드는 말한다. <We Were The Mulvaneys>였지만 <We Are …>인 동시에 <We Will Be The Mulvaneys>일 거라는 결말도 열어둔 채.

 

 

--  "그냥 그렇게… 가족은 그렇게 될 수가 있어. 뭔가 잘못됐는데 아무도 그걸 바로잡는 법을 몰라서 세월만 흘려보내는 거지. 아무도 바로잡는 법을 몰라서." (p.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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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베이니 가족>은 이미 오래 전에 북미권에서 유명세를 탔다. 2001년, 오프라 윈프리가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자신의 방송에서 소개했던 덕이다. 작가인 조이스 캐럴 오츠는 이 작품 외에도 다양한 장르와 문체를 선보인 소설들로 이미 정평이 난 미국의 대표 소설가다. 여전히 전방위적 다작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가정의 역사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이 현실감 넘치는 서사, 곧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그냥 나온 게 아닌 셈이다. 이 작품 이후 조이스 캐럴 오츠의 작품 몇 가지를 더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책을 덮은 후 한동안 멀베이니의 이런저런 얼굴들이 스쳤다. 등장인물들이 아른거리는 경험은 꽤 오랜만이었다. 2차원의 평면을 거침없이 활보하는 듯한 생생함에 압도당한 기분이랄까. 서사가 주는 호흡을 기분 좋게 들이마실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책은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주 먼 길을 돌아 찾은 이 가족의 평범한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해주고픈 열없는 마음이 다 들었으니 말이다.

 

 

 

 


멀베이니 가족

저자
조이스 캐롤 오츠,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8-12-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국의 대표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풀어낸 미국적 삶매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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