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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47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연(緣) ​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피천득 작가는 인연을 이른 적이 있다. 사람 사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경험, 장소, 심지어는 문장 몇 줄에까지도 '아니 만나는' 편이 어쩌면 더 좋았을 연이란 게 있다. 안타깝게도 이, 내게는 그런 소설이 돼 버렸다. 열여덟 즈음이었나. 를 처음 읽었다. 쉴 틈도 없이 한 권을 내리 달렸다. 전율이랄까 충격이랄까. 이런 책이 다 있구나 싶었다. 간단히 이르자면, 60년대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을 6살배기 루이즈 진 핀치의 짓궂지만 더없이 순수한 눈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너무 무겁지 않고도, 외려 그렇기에 흑백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비춰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백인 동네의 멸시를 이겨내고 자신만의 정의를 지켜가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 2016. 8. 22.
<페스트>, 알베르 카뮈 ​ ㅡ 나는 인간들의 모든 불행이란 그들이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따라서 나는 정도를 걷기 위해 분명히 말하고 행동할 결심을 했습니다. (p.325) “그렇지만 말이죠,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많은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327) “남들은 이렇게 말하죠. 자칫하다간 이건 뭐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겁니다. 한데 말입니다, 페스트란 대체 무언가요? 인생인 거죠, 바로 그거죠, 뭐.” (p.393) ㅡ 만성화한 재앙의 극단에서 삶의 무력에 정면으로 맞부닥친 인간의 모습을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그린 수작이다. 시점에 다가서기는 하나 온전히 밀착.. 2016. 8. 22.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 ㅡ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또한 어쩌면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앞에서 몸서리를 치며,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슬픔에 빠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우리 역시 덧없이 스러져갈 것이며 조만간 시들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p.245) ㅡ 처음으로 감동을 받은 고전문학이 이었다. 책은 초등학생을 겨냥한 문고판이었다. 돌이켜보면 번역도 여기저기.. 2016. 8. 22.
<사람의 아들>, 이문열 ​ ㅡ 그때는 먼저 그 거짓된 사람의 아들, 살아 움직이는 독선의 말(씀)부터 이 땅에서 내쫓아야 한다. 그의 독기 서린 입김이 너희 순진한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훼의 누룩이 이곳에서 뜨는 것을 막아야 한다. 너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대지와 인간들을 지켜야 한다. 어쩌면 그 거짓 ‘사람의 아들’은 자질구레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숨겨왔을지도 모르고, 남달리 길고 미끄러운 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저 한 무력한 사람의 아들로 그와 싸워야겠지만, 그래도 이 대지의 인간들은 언제나 네 편에 있음을 잊지 마라. 보다 높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너의 동류(同類)를 위해 네 힘을 다 쏟고, 멀리 하늘에 있는 왕국이 아니라 너희가 발 딛고 선 대지를 위해 네 슬기를 다 펼쳐라. (p.3.. 2016.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