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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47

개와 늑대의 시간 ::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벌써 땅거미가 지는군. 영빈은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돌려 말하곤 했다. 그러면 현금은 아니야, 지금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맞받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나는 그 반대야. 낯설고 적대적이던 사물들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친숙해지는 게 바로 이 시간이야.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도 나는 그 말이 좋아.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게 만날 만날 낯설어. 너무 사나워서 겁도 나구, 나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2015. 7. 18.
<먼지의 방>, 김승옥 “고등학생 시절에 장래 직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습니다. 그때 정치가가 된다면 하고, 제가 우리나라 정치가가 됐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상상해봤습니다. … 간단히 말씀드리면 부국강병 정책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른 가치라기보다 우리가 그래도 약소국가라는 한계를 느낍니다. 부국강병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멍청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똑같은 비율로 부국강병 경쟁을 한다면 국민들은 영원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는 항상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을 거고 그래서 막상 전쟁이라도 터지면 우리보다 강대한 나라에 우리는 전멸합니다.” … “내 생각으로는 자네 생각에 크게 두 가지 잘못이 있어. 첫째는 정치의 목적은 부국강병이 아.. 2015. 7. 18.
<목포행>, 이청준 언젠가 한 친구와 술이 몹시 취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친구 주정 삼아 저더러 왜 요즘 글을 잘 쓰지 않느냐 시빌 걸어오더군요. 전 그저 평소 느낌대로 글이 잘 씌어지지 않아 그런다 했더니, 그 친구 대뜸 저더러 그새 겉늙은이가 다 됐다고, 겉늙은이처럼 고고한 소리 말라고 다시 시비예요. 공연히 세상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개인의 삶인데 쓸데없이 너무 세상사에 휩쓸려 같잖은 소명감이나 비분강개 속에 자기 인생까지 허망하게 늙혀버리지 말라구요. 그러면서 그는 아주 의기양양했어요. 자기에겐 이 세상이라는 게 뜻밖에 수월하더라구요. 세상살이는 그저 쉽게 쉽게 살아 넘어가야 한다구요. 전 그 친구에게 짐짓 한번 대들어 봤지요. 세상의 힘들고 어려운 구석은 .. 2015. 7. 18.
사실의 발전 ::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 권리의 특성, 그것은 영원히 아름답고 순수하게 있는 것이다. 사실은, 겉으로는 아무리 필요할지라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잘 받아들여졌더라도, 만약 그것이 사실로서만 존재한다면, 그리고 너무 적은 권리밖에 포함하지 않거나 전혀 권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반드시 보기 흉해지고, 불결해지고, 아마 흉측하게까지도 되게 마련이다. … 마키아벨리를 보라. … 그는 단지 이탈리아의 사실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사실이고, 16세기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19세기의 도덕관 앞에서는 추악해 보이고, 사실 추악하다. 이 권리와 사실의 투쟁은 사회가 시작된 이래 계속되었다. 이 싸움을 끝마치고,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현실을 융합시키고, 권리를 사실 속에 조용히 침투시키고, 사실을 권리 속에.. 2015.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