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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통과하다 시간마다 색깔이 있다. 냄새가 있고 진동이 있다. 그 시기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향취가 시간의 통로마다 배어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양태를 지닌 그 시간들 중 하나를 건너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을 '통과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전자가 능동태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후자는 보다 수동적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사건들, 같은 사건으로도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마다 다른 사실들, 제각각의 사실이 빚어낸 세계와 그 세계를 품은 시간을 온몸으로 투과해내고 있다는 말이 가장 적확하지 않을까 싶은 날들이다. 어쩌면 시간과 세계는 오직 발화(發話)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이야기들이 한 사건을 향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군할 수도 있다는 것에 때로는 소름이 끼치곤 .. 2020. 3. 10.
포스트-니체형 서문 역사란 결국 무엇인가? 대략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문서철인가? 역사가 혹시라도 세르반도 수사가 멕시코산 용설란을 발견했을 때의 중요한 순간이나, 에레디아가 자기 영혼의 절망 앞에 사랑하는 야자나무 숲을 보지 못했을 때의 감정을 기록하는가? 충동, 동기, 인간에게 밀려드는 비밀스러운 생각들은 등장하지 않고 역사에 의해 수거되어 등장할 수도 없다. 이것을 외과의조차도 고통받는 환자의 아픈 감정을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나 전쟁을 빛낸 사망자, 즉 명확한 것만을 기록한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방대한 책은 순간적인 것만을 요약한다(그리고 충분하다), 원인이 아닌 영향을. 그래서 나는 역사보다는 시간에서 찾는다, 그 영원하고 다양한 시간에서. 인간은 그 비유다. 왜냐하면 비록.. 2020. 3. 7.
조심해야 하는 사람 요 며칠 내 일상의 절반은 '타자-되기'의 실사 체험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마치 라캉의 수제자라도 되는 양 충실하고 올곧게 내 스스로를 타자화했다. 엄밀히 말하면 라캉 식 타자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어딘지 처량하기까지 한 작업이었지만 타인이 되어보긴 되어본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타인의 삶을 투영하느라 나의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실망하고 좌절하고 지쳐 마감하는 하루의 앞에서, 나는 불과 몇 달 전의 모든 것들을 돌이키고 있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최후의 방패막이었을 줄은. 그 마음을 몰랐고, 그 상황을 몰랐다.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생각한다. 그 고마운 마음과, 이제야 윤곽을 드러낸 또 다른 마음을. 나는 이따금 '겪는 게 최선'이라며 타인의 말보다 내 경험을 지나치게 앞세.. 2020. 2. 26.
당연 거부 선언 부쩍 울퉁불퉁해진 마음 탓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시작된, 그리고 계속 건너가야 할, 혹은 더 격하게 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의 굴곡 탓인가. 그러기엔 오지도 않은 것들에 이렇게나 하루에도 몇 번씩 쿵쿵 내려앉을 일인가. 멀미와도 같은 감각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참아내야 하는 날들이, 정녕 그 탓인가. 절대 아니다. 나는 '당연한' 것들에 지쳤다. 왜 내가 당연한가. 인간에 대한 실망에 절어 나의 나날을 반추한다. 왜 내가 하는 것들은 당연하고, 채근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에 대고 묻지만, 반향도 답도 없는 침묵만 돌려받길 수 일 째. 이런저런 이유로 울퉁불퉁해진 마음을 건너는 날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중이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한 날엔 책마저도 읽기 싫어.. 2020.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