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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시간을 통과하다

by 디어샬럿 2020. 3. 10.

시간마다 색깔이 있다. 냄새가 있고 진동이 있다. 그 시기를 구성하는 사건들의 향취가 시간의 통로마다 배어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양태를 지닌 그 시간들 중 하나를 건너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을 '통과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전자가 능동태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후자는 보다 수동적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사건들, 같은 사건으로도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저마다 다른 사실들, 제각각의 사실이 빚어낸 세계와 그 세계를 품은 시간을 온몸으로 투과해내고 있다는 말이 가장 적확하지 않을까 싶은 날들이다. 어쩌면 시간과 세계는 오직 발화(發話)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다른 이야기들이 한 사건을 향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진군할 수도 있다는 것에 때로는 소름이 끼치곤 한다. 아주 다른 사건들로도 하나의 사실이 되는 한편, 전혀 다른 사실들이 이 세계의 톱니바퀴에 기름칠을 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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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시절, 나는 무려 삶에서 이렇듯 지극히도 '이론'적인 세계에 맞부닥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담론들은 (그때만 해도) 내게는 삶의 영역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흥미를 가지고 공부했지만,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이었다. 나는 내 상아탑을 사랑한 한편으론, 그 엄혹한 세계가 차마 내 것은 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담론의 꺼풀을 벗어내고 이따금 곱씹어보는 그 세계는 그야말로 투쟁의 현장이었고, 타고난 쫄보인 내겐 그 치열한 전투를 감당할 배짱이 없다 싶었다.

사회인이 되고서 홀로 있는 순간에 이따금 생각한다. 삶은 좀처럼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고. 모르는 새, 나는 그렇게나 두려워했던 '세계'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학부 때의 그것은 언어로 조탁되고 포장이라도 됐건만, 삶의 한가운데서 만나는 이 투쟁의 실마리와 잔흔들은... 무지막지하다는 말로밖에는 내 경험의 지평에선 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정말로 수많은 의도들과 정치들과 필연들이 얽히고설켜 있다는 사실을 되뇌는 날만 늘어갈 뿐이다. 세계는 때로는 나의 의도와 마음과 언어와는 별개로 축조되고, 시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때가 있다.

섣불리 마음을 댈 수 없는 날들. 말들을 덧대기 망설여지는 순간들. 그럼에도 삶에서 한 번은 마주해야 했을 사태들. 알수록 버겁지만, 한편으론 현명하게 이겨내고 싶다고 하는 내 안의 또 다른 외침... 지금의 나는, 그러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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