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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책

<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by 디어샬럿 2015. 6. 23.

 

 

 

 

  국내에선 눈에 잘 익지 않은 이름.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케냐 태생의 저명한 작가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최근까지 꽤 다작한 듯하지만, 국내에는 번역된 판본이 손에 꼽힌다. 그나마 작가 생애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이 소설이 번역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언젠가 사 두고 모셔뒀던 걸 눈에 띈 참에 해치웠다. 아무래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명칭들과 문화에 처음에는 버벅였지만, 막상 읽으니 또 단숨에 후루룩 넘어간다. 제3세계 문학의 매력이랄까. 인공의 자극보다는 재료 본연의 생동감으로 미뢰를 일깨우는 맛이라 하면 좋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미감이라 하면, 이 작품을 설명하는 데 얼추 무리는 없을 것이다.

 

  1967년 발표된 <한 톨의 밀알>은 응구기 와 시옹오의 대표작이다. 작품 자체의 메시지도 그렇지만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특유의 서정성에 주력했던 이전의 작품, 식민통치의 잔재와 내전으로 뒤엉킨 현실 타파를 일갈하는 이후의 리얼리즘 경향 사이에서 이 소설은 정확히 '가운데' 위치했다는 평을 받는다. 분기점 혹은 분수령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은 그런 상징에 충실한 모양새다.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의 흑백갈등이라는 틀 아래 개인들의 도덕과 욕망, 이상과 현실이 점묘화처럼 겹치고 도드라진다. 시기상으로는 1952년부터 시작된 '비상사태'(키쿠유 족과 마우마우 단의 연합으로 행해진 '독립'테러와 이후 영국 정부의 대대적 계엄령)부터 1964년 케냐 독립 직후가 배경. 소설은 1964년 우후루(해방) 기념식을 앞둔 시점을 바탕으로, 플래시백 기법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병치한다.

 

 

--  “우리는 그들의 교회로 갔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목사가 성경을 펴면서 ‘자, 무릎을 꿇고 기도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가 ‘눈을 감읍시다’라고 말하자 우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그는 성경을 읽기 위해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우리의 땅은 사라지고 총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계속 성경을 읽으면서 좀이 먹지 않도록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보물을 땅, 그것도 우리 땅에 두었습니다.” (p.31)

 

 

--  “기억하세요? 우리 상당수는 스스로를 기만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수치심을 덜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조직에 대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우후루(해방)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을 때가 다가왔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오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 자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나라 전체라도 백인에게 팔아넘겼을 것입니다. 저는 키히카와 같은 사람에게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강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용소에 있을 때 하나같이 당신을 우러러봤고, 당신 때문에 열이 받쳤으며, 당신을 증오했던 이유입니다. 끝끝내 배반하기를 거절했던 당신 같은 사람은 우리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용기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겁쟁이였습니다.” (pp.120-121)

 

 

  작가는 당시 케냐가 직면한 다양한 갈등을 가상의 인물에 부여한다. 백인에 대항하는 흑인, 나라를 잃은 피지배 민족, 구심점을 잃은 채 남겨진 조직원, 오늘의 적이 되어버린 과거의 친구 등. 개개의 사정과 심리가 이리저리 얽히며 작품의 현실성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개중 대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더욱이 케냐뿐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여느 문화권이라면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아니, 지배-피지배의 모든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들의 양상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현대사에 깃든 약소국의 비극. 보편성과 특수성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셈이다.

 

  소설 속 개인들은 상황이 빚어낸 갈등에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한다. 마우마우 단을 이끄는 키히카가 영웅이자 절대선으로 작품 내에 군림하는 가운데, 혈혈단신으로 자신만의 삶을 이룩하며 현실에 만족하던 중 느닷없이 '비상사태'의 격랑에 빠져든 무고, 뭄비를 사이에 둔 연적이자 친구였던 기코뇨와 카란자의 엇갈린 운명, 기코뇨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카란자의 아이를 낳게 된 뭄비 등 하나하나의 삶과 상황과 이유들이 이리저리 흩뜨려 있다. 저마다 합리화하기 힘든 배신과 부끄러움을 안은 채 그럴 만한 변명과 분노를 방패로 살아간다. 행간으로 읽히는 제각각의 사정들. 이쯤 되면, 독자는 어느 것에도 섣불리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게 된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요한복음 12장 24절 (p.352)

 

 

  반목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꺼이 '한 톨의 밀알'이 되는 것은 무고라는 인물이다. 가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묵묵히 동원에 참여한 그는 줄곧 마을에서 암묵적인 영웅으로 대접받아 왔다. 그러나 우후루 연설에서의 용감한 자기고백을 통해 스스로를 옥죄던 치욕에서 해방된다. 분명, 그의 행동은 '반민족적'이었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는 그를 향해 청중들은 침묵 속에서 경멸의 눈빛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진실과 평생의 속죄를 택했다.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고백은, 치열히 싸웠던 과거의 용사들에게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기코뇨는 뭄비를 이해하고, 카란자의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문질러서 지워버리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법이에요. 그렇게 쉬운 것들이 아니니까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말 한 마디로 지나치기엔 너무 큰일이었어요. 서로 얘기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고,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 다음에야 원하는 미래를 같이 계획할 수 있겠죠. 그러나 지금은 저, 가야 해요.” (p.432)

 

 

  무고의 고백을 기점으로, 흩어졌던 이야기들이 속죄와 용서 아래 하나의 물길로 치닫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용서는 결코 쉬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란 암시가 짙게 깔리기도 한다. 뭄비의 마지막 말이 그것이다. 한 인물의 용기로써 배배 꼬였던 매듭이 한 순간에 풀린다는 다소 낭만적인 설정에도, 이 소설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작가는 해방으로 현대 케냐가 안은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희생과 불신은, 마우마우 단과 "배신자들"이라는 공적 영역은 물론 기코뇨와 뭄비라는 사적인 영역을 통해서도 불편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코뇨의 의심으로 돌아선 뭄비의 마음이 사과 한 마디로 복구될 수 없듯, 무고의 고백으로 촉발된 자기반성이 케냐 현실의 개선으로 바로 이어질 리는 만무하다는 냉정한 인식. 이는 작품 말미에서도 옅게 감지된다. 영국 백인이 지배했던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이들과, 작금의 급변상황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불안함이 기류를 타고 흐른다. 작가의 예감이었을까. 실제로 케냐는 이후 오랜 기간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작품이력에서 정확히 서정과 리얼리즘의 경계에 있다는 이 소설. 결국 그 평가에 딱 들어맞는 결말을 제시한다. 이후 두드러지는 작품세계의 변화로 미루어보면 리얼리즘에 손을 더 들어줘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서정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별 것 아닌 듯한 묘사 속에서도 장엄한 대미를 이끌어가는 성찰의 서사 덕이 아닌가 한다. 더불어 폐부를 이리저리 찌르며 케냐의 향취를 전하는 문장들도 이 작품의 서정적 면모를 이끈다. <한 톨의 밀알> 이후 작가는 식민통치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아프리카의 현실을 날카로운 문장으로 담아내는 데 무게를 두었다고 알려진다.

 

 

  작가는 남다른 조국애와 사명감을 지닌 지식인으로도 유명하다. 데이빗 시옹오라는 본명을 스와힐리어인 '응구기 와 시옹오'로 개명한 것을 비롯해, 1980년 이후의 모든 작품을 스와힐리어로 발표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강의하는 동시에, 각종 활동을 통해 서구의 식민통치가 아프리카에 남긴 상처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도 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거머쥔다면 아프리카 출신 흑인 작가로선 두 번째 수상이다. 공통된 경험이라곤 식민통치를 겪었다는 정도만 꼽을 수 있으리만치 교점이 희박한 문화권. 그럼에도 무리 없이 읽힌다는 게, 비단 작가 한 사람만의 저력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을까. 우리 글들은, 언제까지 번역의 한계라는 방패 뒤에 숨어야 할까.

 

 

 

 


한 톨의 밀알

저자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출판사
들녘 | 2012-03-2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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