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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감사

비가 내게 알려준 것

by 디어샬럿 2020. 11. 19.

출근길에 막내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막내가 늦깎이 군인이 돼 입소한 지도 2주가 훌쩍 지났다. 내 또래들이 복무할 때만 해도 위문편지란 손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국방부 앱의 메뉴로 들어가 글을 쓰면, (아마도) 분대장이 그걸 출력해서 병사들에게 전달하는 식인 것 같다. '등록' 버튼을 누르면 '접수완료' 배너가 붙고, '출력완료' 배너가 뜨면 편지가 병사에게 갈 준비가 됐단 뜻이다. 세상이 정말로 좋아졌구나, 생각하는데 '캠프가족'들 말로는 그래도 종이편지는 또 보내줘야 한단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집에서 온 편지를 소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읽어주는 문화가 있긴 한가 싶지만, 내 경험의 지평에 없는 영역이다 보니 상상에 그치고 만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돌풍을 동반했다. 어쩐지 날이 갈수록 날씨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대개 이런 날은 그러지 않으려 해도 짜증부터 솟구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바람에 뚜껑이 휘청이는 5단 우산의 지지대를 붙잡다 보니 문득 막내 생각이 났다. 오늘 비는 전국적으로 온댔으니까 훈련소에도 비가 흩날리고 있을 터다. 군인에게 우산이 허락될 리는 없으니 이 비를 다 견디며 훈련을 받고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 울적해질 뻔했다. 출근길 아침만 아니었다면 마음 놓고(?) 우울해 했을 텐데, 해야 할 것이 산적한 하루의 시작에 우울 한 방울을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해서 마음을 다잡았다. 출근길의 의지는 전투력을 입은 덕인지 제법 강력한 편이어서, 나는 우울이 될 뻔한 감정을 재빨리 다른 것으로 돌릴 수 있었다.

감사였다. 비를 피하지 않고 국방의 의무에 뛰어든 나의 혈육과, 함께 같은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열댓 살 어린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이었다.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는 우주의 존재를 매 순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보편'의 영역에 들어가 버린 누군가들의 보살핌에 너무 무지했다. 들쳐업어 키운 막둥이가 이제는 나와 이 삶들을 지켜낸다고 하니, 이제야 절대적 타의로 이 행위에 던져진 스물 몇 살 청춘들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양감과 질감과 온기가 한꺼번에 훅 끼쳐 온다. 군인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드디어 활자를 벗어나 십 몇 년을 건너 내 피부로 가슴으로 날아든 셈이다. 실체를 얻은 감사는 한층 깊고 짙어져, 이렇듯 아주 작은 순간에도 자취를 남기며 마음을 데워온다.

이 비에도 끄떡없이 '지킴'을 배워가고 있는 우리 막내. 그런 성격의 성장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 그리고 저마다 주어진 것들을 해내고자 제 나름의 행위로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선의의 구성원들. 나도 그 안에서 부끄럽지 않게, 이 두 손과 발과 머리와 가슴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든 다 건너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식사를 포기한 점심에 왜인지 잊고 싶지 않아 남기는 일기. 오늘의 비는 내게 사뭇 비장하다. 이제야 나의 것이 된 어떤 종류의 감사와, 다시금 다잡으면서 조금 더 놓고 보다 더 인정하게 된 어떤 마음으로 인해. 한 인간이 오롯이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의 덕을 보고 있는지, 이 비가 내게 깨쳐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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