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과 편린 사이/책

<먼지의 방>, 김승옥

by 디어샬럿 2015. 7. 18.

 

 

 

 

  “고등학생 시절에 장래 직업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습니다. 그때 정치가가 된다면 하고, 제가 우리나라 정치가가 됐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상상해봤습니다. … 간단히 말씀드리면 부국강병 정책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른 가치라기보다 우리가 그래도 약소국가라는 한계를 느낍니다. 부국강병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멍청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똑같은 비율로 부국강병 경쟁을 한다면 국민들은 영원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는 항상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을 거고 그래서 막상 전쟁이라도 터지면 우리보다 강대한 나라에 우리는 전멸합니다.” …

 

 

  “내 생각으로는 자네 생각에 크게 두 가지 잘못이 있어. 첫째는 정치의 목적은 부국강병이 아니라 도덕성이라는 점이야. 부국강병은 그 도덕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둘째로 그 도덕성은 인간이 불완전하고 유한하다는 데서 출발해야 해. 독재자는 역사라는 이름 밑에 인간을 착취하는 거지. 물론 우리나라가 야만적인 제국주의자들한테 혹독하게 악용 당했던 경험 때문에 우선 부국강병 자체가 목적처럼 보이겠지만 최후의 목적이 도덕성이라는 점을 망각하면 자네 말마따나 결국 지금 소련의 위성국들처럼 국민은 국민대로 역사의 노예가 되고 국가는 국가대로 역부족으로 민족의 자주성을 잃게 돼.

 

  인간이 그 생명이 유한하고 그 생각이나 행동이 늘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한다는 건 참 중요한 일이야. 그걸 인정한다는 일이 정작 살면서 보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특히 자기 자신이건 남이건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아. 자기는 완전한데 남들은 다 불완전해 보이기가 쉽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만 불완전하고 남들은 모두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있지. 어쨌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심이란 건 사람이 유한한 데서 나온다고 봐야 돼. … 인간끼리는 너도 욕망덩어리고 나도 욕망덩어리란 걸 일단 서로 인정해야 돼. 인정하고 나서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타협을 해야지. 욕망이란 없앨 수는 없지만 참을 수는 있는 거야.

 

  그런 협상이랄까, 타협도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쉽지 않으니까 정치가 어렵다는 거야. 정치란 건 결국 사람들끼리 삶을 조정해주는 거 아닌가? 그 조정하고 타협 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람이란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거야. 나는 완전한데 너만 불완전하다는 생각에서 폭력이 나오는 거구 남들은 완전한데 나만 불완전하다는 생각에서 비굴과 노예가 생기는 거야. 너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하다는 걸 서로 인정해야만 거기서 관용이 생기고 관용이 있어야만 욕망의 조절이 가능한 거 아니겠나? 역사라는 이름 밑에, 국가라는 이름 밑에, 인간의 욕망을 조절하려 하지 않고 없애려 들거나 자기는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사상을 나는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적이라고 보는 걸세.”

 

 

 

- 김승옥, <먼지의 방>

 

 

 

---

 

 

  한때 김승옥에 적이 빠진 때가 있었다. 날카로움과 감미로움을 쉴 새 없이 오가는 긴 호흡의 문장에 온통 마음이 휘감겼던 날들이었다. 안개가 짙게 깔린 낭만의 느낌이랄까. 아마도 혹은 필연적으로 <무진기행>의 이미지가 강한 탓인 것 같다, 내가 김승옥 작가의 문장을 여전히 '안개'로 떠올리는 이유는. 벗어나고 싶지 않은 부연 횟빛 문장들에 정신 없이 취했던 시간.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자체로도 이미 안개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