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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 편린 사이92

<절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존재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나와 같은 이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의뭉스런 궁금증으로 다가온다. 진짜로 존재할까 싶은 묘한 호기심, 그러면서도 진짜로 존재하면 어쩌지 싶은 공포 따위의 것들. 수백 년 문학의 역사에서 '분신'이란 소재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존재로써 나를 알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 닿아있는 지점이, 바로 '분신' 모티프인 것이다. 나보코프의 은 분신에 관한 이야기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렇다. 자신과 똑 닮은 (것이라 생각하는) 이를 통한 완전범죄를 꿈꾸는 한 예술가의 심리를 현란한 언어로 그려낸 소설. 대표작 에서 여지없이 드러낸 그만의 천재성이 번뜩이는, 어딘.. 2016. 8. 23.
<농담>, 밀란 쿤데라 ​ ㅡ 과거의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그렇다, 내가 제마네크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네크가 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pp.490-.. 2016. 8. 22.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ㅡ 하지만 난 정확하게 미끼를 드리울 수 있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단지 내게 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 운이 닥쳐올는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아닌가.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게 되거든. (p.34) ㅡ 같은 곳에서의 세 번째 면접.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본인은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후련함과 상실감 사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달래려 집어든 책에서 저 문장과 맞닥뜨렸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보다는 오히려 빈틈없이 해내고 싶어. 헤밍웨이의 문장은 짧고 단단하다. 한 치.. 2016. 8. 22.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연(緣) ​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피천득 작가는 인연을 이른 적이 있다. 사람 사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경험, 장소, 심지어는 문장 몇 줄에까지도 '아니 만나는' 편이 어쩌면 더 좋았을 연이란 게 있다. 안타깝게도 이, 내게는 그런 소설이 돼 버렸다. 열여덟 즈음이었나. 를 처음 읽었다. 쉴 틈도 없이 한 권을 내리 달렸다. 전율이랄까 충격이랄까. 이런 책이 다 있구나 싶었다. 간단히 이르자면, 60년대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을 6살배기 루이즈 진 핀치의 짓궂지만 더없이 순수한 눈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너무 무겁지 않고도, 외려 그렇기에 흑백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비춰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백인 동네의 멸시를 이겨내고 자신만의 정의를 지켜가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 2016. 8.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