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는 답지않게 진득하다. ’허무‘라는 단어가 울대를 드밀고 혀 끝으로 나와 세상에 나설 때, 그 언어는 기어이 입안에 헛헛하고 텁텁한 기운을 남기고야 만다. 심지어 어떤 허무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나름대로 몰아붙인 것들을 뒤로 한 채 너무나 급작스럽게 맞딱뜨리는 끝 - 낭떠러지- 에 이르러, 또 한 번 짙은 허무에 무릎을 휘청이며 나는 또 이 단어의 위력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잘 해왔다곤 감히 말하지 못해도 많은 것들을 뒤로, 뒤로 기약하며 꾸역꾸역 달려온 길이었다.
불현듯 허무는 안개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단어의 ‘무(無)‘가 ’무(霧)‘와 같은 음을 공유한다는 게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허무는 참 짙다. 도와주신 분들이 눈 앞에 스치고, 이내 자꾸만 스며서 조금 울었다. 미욱한 나를 대신해 챙겨주고 보듬어주신 마음들이 자꾸만 양각처럼 돋아올랐다.
그러다 문득 더욱 착잡할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의 안개 따위는 감히 가 닿을 수도 없을, 켜켜이 쌓인 누군가의 정의 더께를 생각했다. 쌓인 시간만큼 단단한 마음이라 믿었을 터라 더욱 삼킬 수밖에 없는 어떤 실망과 동정의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리며, 한때 너무나 좋아했던 작가의 단편선 제목을 근 십수 년 만에 떠올렸다. 침처럼 고이는 열없고 철없는 마음과 허무를 꿀꺽꿀꺽 삼키며, 구름 같은 이 시간을 잘 헤치자며 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 어떤 하루의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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