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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지나간 대로 의미 있는 시간

by 디어샬럿 2021. 6. 24.

또다시 제법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휘발된 날들 사이사이 남겨야 했을 사건도 마음도 분명 존재했을 거다. 적잖은 날들을 지나왔는데, 통과한 순간들을 곱씹어도 우러나오는 것이 없어 조금 서글펐다. 지나간 것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건 그 시간을 충실히 체화할 수 있는 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기록이든 기억이든, 인간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수단을 통해 남김으로써 시간을 소화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어디에도 남지 않은 내 ‘백지시간’들은 어쩌면 행방조차도 묘연해져 버린 게 아닐지. 상념이 여기까지 이를 때면 모로 누운 채 입술을 물어뜯으며 밤잠을 설친다.

서너 날은 일터에서 쪽잠을 자거나 밤을 새웠고, 서너 달 동안은 일상의 대부분을 회사라는 공고한 세계에 봉납했다. 당시의 그것은 하나의 성역이래도 좋을 터였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후순위로 제쳐둬야 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준 신성불가침이랄까. 집에선 잠만 자고 나오는 수준이었으니 사실상 일상을 오롯이 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현실을 자각할 때면 문득 슬펐다. 누군가는 퇴근하고도 아이를 돌보고, 넷플릭스라도 한 편 보고 잔다는데 나란 사람은 멀티태스킹이 이렇게도 힘들구나 하고. 가끔은 한때 뜻을 함께했던 어떤 시간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울적해졌다. 프로그램에 기사에 치이면서도 그 오빠는 팟캐스트를 만들고 저 언니는 책까지 냈던데. 본질적 자아가 사회적 자아에 철저히 구속된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으로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이내 축축한 초조함이 엄습했다.

그 시간들은 그랬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작은 방황과 순간순간 마주하며, 모든 욕구와 가능성을 무한정 미뤄두기만 했다. 그래도 완료일이란 것이 기어이 왔고,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의 나는 모처럼 여유로운 일상에 적당히 빠듯한 일과를 섞어가며 삶의 점도를 유지하고 있다. 요사이는 너무 묽지도 않고 뻑뻑하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잔뜩 굳었던 일상이 말랑해지니 소원했던 것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일을 핑계로 팽개친 것들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다가서고 있다. 김태훈 삼촌(이라 불러야 할 나이뻘이지만 왠지 오빠라고 해야 할 듯한...)의 아침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선배가 보내주신 저서를 공들여 읽으며 다음 읽을 책을 즐겁게 고민한다. 그새 이사한 새집에서 동백섬까지의 사뭇 달라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조깅도 하고, 라스트 킹덤을 정주행하고선 알프레드 대왕 역의 배우에게 아주 잠깐 빠지기도 했다. 회사에서 소소한 틈을 공유하는 몇몇과 점심도 먹고, 여전히 사랑하는 보고픈 이들에게 묵은 안부를 묻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잔잔한 불안감을 끌어안고 산다. 스스로가 불완전 상태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이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져서일 수도 있다. 언제고 돌발사건이 매복을 끝내고 정체를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요 며칠의 나는, 적어도 지금에 충실하자며 최근에 다시 먹은 굳은 마음을 이리저리 비추어본다. 사물과 인연이 빚어낸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오늘도 나의 궤도는 하루치 궤적을 남겼다. 오직 사람의 표정과 눈짓과 말들과 흔적만으로도 이렇게나 극단적인 감정들이 오갈 수 있구나 싶었던 날. 언제고 또 만나고 배우고 익숙해질 수 있겠지. 그저 더 충실하고 표현하며 가까워지고 감사하면서 사랑하는 수밖에. 어쩌면 그런 것들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시간을 만드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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