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밀의 화원/일상

초월식 사고

by 디어샬럿 2020. 2. 10.

몸이 좋지 않았다. 오전에 병원에 들렀다. 경미한 장염이라 했다. 이 증세로 아파본 게 근 6년 만인 것 같다. 약을 먹고 오후 내내 혼절한 듯 잠이 들었다. 약은 생각보다 독했고, 몽롱한 채 깨어보니 오후 4시가 훌쩍 넘었다.

모로 누워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너비 7cm 높이 14.5cm짜리 직사각형의 세계는 초를 다투며 터져나오는 천재 감독의 수상 소식을 잔뜩 응축해 놓고 있었다. 고작 네 시간의 공백에도 따라갈 뉴스가 제법 많았다. 나는 그새 문명의 이기가 빚은 여유를 노동이 재빠르게 대체한 현장의 산 증인이 돼 있었다. 물론 그런 행위도 노동이라 표현하는 걸 허락한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그 단어가 주는 중량감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자세조차 ‘노동’이라는 단어가 넓은 아량으로 품어준다는 전제 하에 허용될 말이었다.

나는 의무인 것 마냥 속보들을 좇았다. 단지 네 시간이었는데도 그랬다. 정보에 뒤떨어졌다는 건실한 조바심으로 이어질 만한 격차도 아니다. 그저 모두가 공백을 견뎌내지 못하는 시절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채워넣을 만반의 태세로. 하다 못해 몇 분 전에 지나간 뉴스를 검색하는 행위로라도 말이다.

그러다 새삼 노동의 포화를 생각했다. 문명의 이기가 노동을 양산하는 시대다. 이기와 직결된 노동이 줄어드는 대신, 병렬적으로 연결된 다른 노동이 잽싸게 자리를 대체한다. 결국 노동의 총량은 같아진다. 그나마 ‘같다’는 말로 갈음되는 게 다행인 형국이다. 줄어든 시간만큼 투입되는 노동의 총량이 ‘질’의 문제로 환원되기 시작하면 더욱 답이 없어진다. 편하고자 만든 이기로 인해 더 ‘완벽한’ 노동이 요구되는 단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세탁기 발명의 모순이 이와 같다 ㅡ 복수전공했던 수업의 교수님 말씀이었다. 세탁기가 빨래 노동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을 이끌 것이라 예상했지만, 여유 시간에 상응하는 또 다른 형태의 가사 노동을 야기했다는 것. 현대 사회의 특성이랍시고 운운되기에는 이기와 노동의 역사가 오래된 셈이었다. 이쯤 되면 인류사는 노동을 끊임없이 양산하고자 하는 체제와의 투쟁 혹은 공생의 족적이 아닐까. 그리고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언젠가의 어떤 자리에서 "제겐 한량 DNA가 있나 봐요" 하던 누군가의 자조가 스친다. 결론적으로 그의 말은 전제부터 틀렸다. 생의 기간이래봤자 도합 육십 년을 간신히 넘는 우리가 몇 만 년을 거스른 슈퍼인류로 거듭날 리는 만무하니까.

-

업무 총량의 법칙. 며칠 전 P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낸 말이다. P는 말했다. 일은 없어지는 만큼 생기는 법이라고. 일하면서 터득한 자신의 지론이라 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법칙조차도 이 체제를 채택한 인류의 피조물이라고.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체제를 살며 체계를 축조한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조직과 업무와 관계에서조차 이 ‘총량의 법칙’을 놓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 주지 못해 불안해하고 더 해내지 못해 괴로워하며 더 받지 못해 못마땅해 하고 더 가지지 못해 분노한다.

기저기 어설프게 발을 걸친 나는, 요사이 읽는 세 번째 마르케스 소설로 새삼 남미 문학가의 심정이 되어보곤 한다. 지난하고 가혹한 식민지배와, 그를 뛰어넘는 빈곤이 삶의 말단까지 침투했던 근대의 그곳. 그럼에도 그 대륙의 작가들은 문장 하나하나에 풍성한 환상을 불어넣었다. 나름의 방식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그런 식으로 '뛰어넘는' 편을 택한 것이다.

반항도 순응도 아닌 초월. 그건 용기이자, 견디는 동시에 극복하는 방법이다. 도처에서 닥치는 노동으로 고민하는 나는, 발칙하게도 남미 문학가의 심정으로 그들 식의 비법을 되뇌어 본다. 침잠하고 갉아먹히기보다 적당히 관조하고 넘어가리라. 너무 힘들 땐 내가 지닌 것들로 현실을 채색하고, 정말 안 될 땐 현명한 침묵으로 견디는 방법도 있다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으며 새삼 다짐해보는 장염발 휴일 하루의 끝.

'비밀의 화원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심해야 하는 사람  (2) 2020.02.26
당연 거부 선언  (0) 2020.02.18
B와 D 사이  (0) 2020.02.04
어떤 시간  (2) 2020.01.12
홀가분 지수 20%  (0) 2019.10.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