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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호모 넷플리쿠스의 변명

by 디어샬럿 2020. 11. 16.

말콤X의 암살을 다룬 넷플릭스 6부작 다큐멘터리를 보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첫술을 들자마자, 신앙의 맹목성과 악의 상존을 푸코의 진자마냥 플롯 가득 흔들어대는 넷플릭스산 영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상 개시용으론 다소 격하고 제법 질척인 영화의 뒤에, 지난해 발굴된 피라미드와 소셜 플랫폼의 필터버블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재생했다. 놀랍게도 이조차 넷플릭스였다. 또 하나를 더 보자니 어느새 밤이 깊었고, 며칠 읽지 못한 머리맡의 책에 손을 뻗어 몇십 페이지를 읽고선 눈을 감았다. 왜인지 잠걸음은 더디 왔고, 무의식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갖은 생각을 유튜브발 음악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충실하게도 넷플릭스 그리고 각종 미디어를 오간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하루였다. 이쯤 되면 나야말로 미디어 생태계가 만들어낸 신인류가 아닐까. 잠결에 닿기 전 그런 생각도 잠깐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실로 온전하고도 오롯이 미디어의 세계에 편입돼 있었다. 어쩌다 4년 이상을 바쳐 미디어를 공부했고 미디어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했지만, 요즘처럼 미디어에 온몸을 내맡긴 듯한 나날을 보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미디어의 '공격'에 실로 무방비한 수준이 아닌가. 이윽고 나는 곰곰히 요사이의 일상을 되짚는다. 기상 무렵부터 지하철을 타기까지 듣는 라디오,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는 책,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두드리며 보는 TV - 심지어 나는 이때조차 아주 높은 빈도로 이미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켤 적이 많다! - 자기 직전까지 뒤적이는 넷플릭스, 유튜브... 미디어 의존증이래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이 중증도의 증상은 주말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넷플릭스 다큐와 넷플릭스 영화와 이따금의 책, 취향에 맞는 유튜브 채널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 써버리는 수준이니 말이다.

나는 과연 하루에 얼마만큼 미디어를 소비하고 있을까. 일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엔 미디어가 있다. 책이 됐든 영화가 됐든, 하다못해 킬링타임용 유튜브 다시보기가 됐든. 그리고 내 미디어 소비패턴 중 8할은 거대 미디어 자본 콘텐츠에 기인한다. 눈치채지도 못한 새 나의 취향과 선택이 미디어 생태계의 기형적 성장에 단단히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비단 내 '취향'만의 문제일까. 이 땅의 수많은 미디어형 신인류의 취향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넷플릭스는, 어느덧 지구 최고의 초거대 엔터테인먼트 재벌 디즈니도 떨게 하는 미디어 권력으로 군림했다. 호모 넷플리쿠스도 덩달아 무한 증식 중이다. 스스로를 호모 넷플리쿠스네 증식입네, 급조한 말들로 표현하는 편이 마음 편하진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덜하진 않은 것 같다.

4년간 나의 시간을 채웠던 학자들의 이름을, 발칙하게도 윤동주 시인의 별헤는 밤 속 화자라도 된 듯 곱씹어 본다. 마셜 맥루언, 빌렘 플루서,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질 들뢰즈,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이제는 서재 한 칸에 책등 한 줄로 남은 수많은 이들. 나는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다가, 아우라의 소멸을 이르기조차 멋쩍어진 기술복제시대의 대 도래를 입에 올려도 보며, 수없는 내파를 통해 그 자체로 제국이 되어버린 시뮬라크르의 성을 마주하면서 카프카 소설 속 인물들마냥 보잘 것 없어진, 요 근래 더 가속화한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을 느껴도 본다. 그리고선 이 공부가 이렇게 써먹히기도 하는 시대를 나는 기어이 살아내고 있구나 하며, 알량하게도 마음 한 구석에 스미는 위안과 함께 별 수 없는 호모 넷플리쿠스로서의 '자각'을 자조한다. 이렇게나마 미디어 제국에서 한 발자국 정도는 떨어져 나온 셈이라며, 그래도 4년어치 돈값은 하고 있는 거라며, 마치 이것이 거대 미디어 자본을 향한 몸부림이라도 되는 양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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