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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조우

날개 달린 시인의 연애편지

by 디어샬럿 2014. 7. 28.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하기 벌써 두 번째입니다. 그 한번이 내 시골 있던 때입니다. 


  이른 말 허면 웃을지 모르나 그간 당신은 내게 커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고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멀어지고 있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이 알았었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걸음이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로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걸으면서 나는 별 이유도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죽을 뻔 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로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웃을 편지입니다. 


  "정희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됐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었다. 내 이제 너와 더불어 즐거웠던 순간을 무덤 속에 가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처럼 어리석진 않았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같기를 빌지도 모른다. 


  정희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너를 잊을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희야, 이건 언제라도 좋다. 네가 백발일 때도 좋고 내일이래도 좋다.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찾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디 내게로 와다고.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적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다구니도 좋다.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희야 너를 위해 네가 다시 오기 위해 저 야공(夜空)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이 살아가련다......."


  ―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었으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있을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럼 약아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었던지 내가 글을 쓰겠다면 무척 좋아하던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럼 속삭이던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언짢게 하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다고 해서 쓰기로 헌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만나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箱 




[경향신문] 시인 이상, 최정희 작가에게 연서… 권영민 교수, 유고서 발견해 공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23210706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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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해두고 싶던 누군가의 비밀을 몰래 들춘 느낌이다. 연애편지라지만 달콤하기보단 어딘지 아픔이 스민 것 같다. 곧 버림받을 것을 아는 자의 서늘한 예감.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붙잡아보고픈, 좀 더 사랑하는 이의 간절함. 단어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에 날이 잔뜩 서 있으면서도, 내 말이 가시가 되진 않을까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정말로 많이 좋아했구나 싶다.


  "이제 내 맘도 무한 흩어져 당신 있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는다"는 말이 꽤 울린다. 분명 거짓말이었을 거다. 너울치는 스스로의 마음을 말로나마 달래고 싶었을 뿐. 저 약속을 건네받은 이후 만나기 직전까지 하루하루 그를 그렸을 모습이 선하다. 심장이 터질 듯 설레다가도, 내가 이이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있구나 라며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에 부서지는 자신을 넋놓고 볼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런 너를 어떻게 보내니 울며 밤을 지새우다 벌겋게 퉁퉁 부은 눈으로 '정희'를 만나러 가진 않았으려나. 더 사랑하면 진다는 말에 늘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영 공염불은 아닌 것 같다. 실연 덕에 짧은 생애 그토록 멋진(...) 작품을 남긴 거라면 삶이란 참 잔인하다. 


  그나저나 이상 시인 꽤 미남과에 속하지 않았던가? 굉장히 이지적인 인상이어서 깜짝 놀랐던 첫 기억이 있는데... 그 시대가 선호하는 상이 아니었나, 아님 최정희 작가 타입이 아니었던 건가. 게다가 이러고선 김동환 시인과 결혼한 최정희 작가는 30년대판 팜므파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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