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피리라도 빌려서 연습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피리꾼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랑도 철학도 민중도 국제문제도 피리로 불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당파와 군집, 선언과 결사의 시단은 무섭습니다.
피리. 피리. 피리꾼은 어디서나 언제나 있는 법이지요.
- <근대풍경> 편집부에 부친 편지에서,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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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향수' 시인 정지용 새 작품 발굴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48750.html?_fr=sr1
채플린을 흉내내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다.
모두가 와르르 웃었다.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가지 않아
엉덩이가 허전해졌다.
채플린은 싫어!
화려한 춤이야말로
슬픈 체념.
채플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채플린 흉내>
음침한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아래 서성이며
진흙과 장미와 찢어진 신발의 시를
계획하고 있다.
강아지의 축축한 정열에 젖어 짖으며
그 근방을 온통 뒹굴다 온 뒤
모자도 온통 너덜너덜
참으로 사랑스런 외톨이의 심장도
흠뻑 젖어 부들부들 떨며
온실과 사랑과 촛불을 자꾸만 저주하고 있다.
- <비에 젖어>
어울리지 않는 기모노를 입고 서툰 일본어를 지껄이는 내가 참을 수 없이 외롭다. … …조선의 하늘은 언제나 쾌청하고 아름답다. 조선의 아이들 마음도 당연히 쾌청하고 아름답다. 걸핏하면 흐리기 쉬운 이 마음이 저주스럽다. 추방민의 씨앗이기에 잡초와 같은 튼튼한 뿌리를 가져야 한다. 어디에 심어도 아픔다운 조선풍의 꽃을 피워내야 한다.
- <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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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새 시들이 발굴됐다는 소식. 오랜만에 곱씹을 글을 만났다. 시대 앞에 무력한 지식인의 고뇌라는, 입시에서 배웠던 것 같은 기시감 어린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피리로나 세상을 불겠다던 순수문학의 대가조차도 피할 수 없었던 시대의 현실. 서글픈 피리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따갑게 박힌다. 정제된 언어는 힘을 갖는다. 눈물로 혹은 이를 악물며 한 줄 한 줄 덜어냈을 분노와 좌절. 채 담기지 못한 감정들이 올올이 새겨진 글자를 울린다. 조용하지만 무겁게 진동하는 언어들.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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