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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어쩌면 주제 넘는 고민

by 디어샬럿 2014. 7. 27.



 

 

 

  아직은 아픈 손가락인가 보다. 놓친 본방송을 기어이 찾아보고야 말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선지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자기반성과 변화는 필요한 때니까. 다만 방송이 꿈꾸는 '언론의 민낯'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언론의 민낯이 뭐길래? 정의라는 열쇠를 빌려 무단침입을 일삼는 특권의식? 물먹기 싫은 자신은 숨기고 데스크 탓부터 하고보는 위선적인 면죄부? 언론의 민낯이 아름다울 거란 생각이야말로 이젠 벗어버릴 때 아닌가? 환경과 사람이 그대로인 어느새고 그곳의 민낯이 볼 만했던 적이라도 있었나 싶다.

 

  부쩍, 언론이란 플라톤 류의 이데아가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이런저런 미사와 흠결 없는 이론들로 견고하게 구축됐지만 실존여부는 확인되지 않는 천공의 성. 이데아 세계에 세워진 이 튼튼한 성은 정론직필을 국시로 삼으며, 사실과 진실의 배합이 환상적으로 조율되는 완전한 공간이다. 온갖 송사의 세계를 흡수하며 절대적인 균형감각과 공동선을 제공한다. 문제는, 이 성엔 지상과의 통로가 없다는 것이다. 인류는 성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바벨탑을 세우지만 자괴감이라는 응징만 얻을 뿐이다. 이르지 못한 인간은 결국 이데아를 좇아 수많은 미메시스를 양산한다. 이론가들은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성을 따라지어도 보고, 이렇게 지으라며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데아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럴 듯한 때도 있었을 거다. '목수'가 첫번째 미메시스를 쌓아올렸던 ― 언론의 탄생이 옆 마을의 스캔들이나 부고 따위를 전하던 것에서 유래했단 점을 상기하면 이마저도 아닌 것 같지만 ―, 혹은 일부 양심과 지성에 의해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미메시스가 존재했던 환상 같은 시절. 하지만 미메시스의 자기복제가 핵분열만큼이나 진행된 오늘날엔, 사이렌을 만난 오디세우스만큼이나 확인불가능한 신화가 돼 버렸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언론의 민낯이란 것도 환상에 지나진 않나 하는 아픈 회의의 날들만 더해간다. 내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 다시금 보게 된 언론이란, 태생적 한계가 참담하리만치 드러난 잘 그려진 모방에 불과했다.

 

  세계 유수의 언론이라면 달랐을 거라는 공허한 희망도 무의미했다. 아이들의 카카오톡 대화창이 사고의 원인과 해결책보다 앞섰던 우리의 기사를 그대로 갖다썼던 게 CNN과 BBC였다. 울부짖는 학부모 기사가 좋은 반응을 얻자 스토리까지 입혀 후속 기사를 꾸렸다. 제 일이었다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터다. 결국 이 생태계의 본질이 이 정도라는 확신이었다. 죽은 학생의 책상을 뒤지는 일 같은 건 늘상 죄책감 없이 하던 일이다, 맞다 그게 잘못된 일이었지 하고 이번에 알게 됐다...는 모 기자의 자기고해는, 미안하게도 내겐 얼얼한 감동보단 익숙한 뜨악함으로 다가왔다. 저 공부를 하며 만났던 꽤 많은 이들이 그랬다. 다만 일부인 줄 알았더니, 다수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거창한 언어로 눈물의 고백과 반성을 읊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누군가의 책상과 서랍을 뒤졌다. 자신에게 찾아온 잠깐의 순진함을 속죄하고, 이 세계가 원래 그렇다며 조금은 잦아든 목소리로 한껏 합리화했다. 아마도 그 편이 더 쉽기 때문이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보단, 속보 싸움에서 살아남는 언론인으로서의 현실적인 감각을 되찾는 시간이 훨씬 짧을 테니까. 인간에 대한 감각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돌아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언론학 전공서에서 신물나게 본 것 같은 원론들이 해결책으로 잔뜩 제시됐다. 이상적이지만 현실이 받쳐주질 않는다며 그들 스스로 외면해왔던 그 방법 혹은 이론. 잠깐 지상으로 내려온 문제의식이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귀결되는 모양새였다. 차라리 미메시스의 현실을 받아들였더라면. 어차피 미디어란 무수히 내파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것을. 말로는 백 번도 세울 수 있는 이상은 이데아의 영역일 뿐이란 걸, 조금은 더 '쿨하게' 인정했다면 어땠을지. 언론의 민낯을 얘기하며 원래 언론이란 그렇지 않다, 사실은 선의 완전체라는 환상을 견지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현실을 돌아다니는, 펄떡이는 지상의 말을 듣고 싶었다. 현실은 딴판이면서 허울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면 언제고 같은 아픔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론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의 틈을 노골적으로 파고드는 현실의 피뢰침이 필요했다. 

 

  그래도 역시 무언가는 필요하다. 미메시스는 미메시스끼리 잘 살아가면 된다. 속는 셈 치고 믿어보잔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혹 모를 일이다. 아주 작은 도약이라도 이뤄낼 수 있다면. 그 세계의 섭리 같은 무언가가, 한낱 잘 조율된 언어들로라도 작게나마 부서지기 시작할 수 있다면. 어쩌면 세상이 조금은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은 더, 의지할 구석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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