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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조심스러운 정

by 디어샬럿 2017. 1. 16.

 

이사 온 아파트엔 길고양이 몇이 모여 산다.

사실 이사왔다고 말하기엔 어느덧 9개월째다. 게다가 나고 자란 곳이니, 차라리 '돌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수도 있다. 이 아파트에서 20년 가까이 살다 같은 구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갔었다. 다시 오기까지 이곳엔 큰고모 가족들이 살았다. 3년 정도 후엔 작년까지 우리집이었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기도 하다. 돌아왔다기에도 애매하고 돌아갈 거라 하기에도 말이 길어지고. 여러모로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잠깐 뜸을 들이게 되는 공간이다.

어쨌든 이 복잡한(?) 작은 아파트에 길고양이 몇 마리가 들어앉았다. 우리가 이사 간 후부터 다시 오기 전 어느 무렵부터지 않았으려나. 9년 전엔 분명 보이지 않던 녀석들이다.

고양이들은 나름의 룰을 지켜가며 라인별로 몇 마리씩 상주해 있다. 때때로 자기들만의 모임을 여는 것도 같은데, 절대 서로의 라인을 침범하는 일이 없다. 우리 라인엔 서너 마리 정도 사는 듯하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따금 원정 길고양이와 치열하게 영역싸움을 할 적도 있다. 직접 보지 않고도 가히 혈투임을 짐작케 할 수준이다. 그 앙증맞은 몸에서 어찌 그리 캬릉캬릉 하는 소리가 다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 고양이도 엄연히 따지면 호랑이의 모계뻘이니 말이다. 그나마도 봄 즈음엔 외지 고양이 같은 아이들도 몇 보이는 것 같더니만 날이 차니 영 뜸해졌다. 요사이 매일 얼굴을 비추는 건 두 마리. 덕분에 녀석들을 더욱 잘 기억할 수 있게 됐다. 흰 바탕에 노란 얼룩을 지닌 아이 하나와 전체적으로 검은 얼룩이 크게 진 노란 바탕의 아이 하나. 요 둘이 인간으로 치면 절친 느낌인 것 같다.

* * *

고양이들은 날렵함이 밴 적당한 살집을 갖고 있다. 전적으로 아랫층 아저씨 덕이다. 아저씨는 아파트 고양이들에게 매일 밥을 주신다. 술담배가 걱정스러우리만치 지나치신 점만 빼면 정말로 좋은 분이시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인사도 겨우 드리는 사이지만.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이사 온 직후엔 열린 창으로 매일 올라오는 담배 연기가 어찌나 독한지, 흡연자가 아무도 없는 우리 가족에겐 고역이 따로 없었다. 말로만 듣던 민폐 이웃을 우리가 만나버린 것인가! 큰고모 집들이에서 푸념하는 아빠에게 사촌오빠 내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외삼촌, 그래도 좀만 참아주이소. 아저씨 진짜 좋은 사람입니더." '좋은 사람'의 기준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날 사촌오빠는 딱 한 가지를 말했다. 그리고 고작 그 하나에 우리는 대번에 침묵하고 말았다. "그 아저씨 맨날 고양이들 밥 챙겨줘예." 맙소사. 그때부터 그는 세상 착한 이웃이 됐다.

아저씨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고양이들은 작게 운다. 야옹이라기보단 냐아아앙-에 가깝다. 음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공중에 흩날리는데, 침묵하는 대기에 양해라도 구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촘촘이 직조된 공기에 미세하게 얹은 수 한 뜸 같달까. 아주 좁은 틈을 딛는 그네들의 은밀한 발짓 같은 울음소리다. 선천적으로 허락된 야생성이 본인들에겐 사치라도 되는 양이다.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들은 대개 그토록 신중하다. 길냥이 방랑인생 동안 얻어먹은 눈칫밥의 결과일 터다. 고양이들이 몸을 숨긴 아파트 뜰엔 애처로운 울음이 작은 숨처럼 이어진다. 저녁과 밤의 경계에서, 나는 가끔 배곯음에 갸릉대는 고양이들을 눈이 아닌 귓전으로 만날 때마다 가슴에 소금이 맺히는 느낌이었다. 그 소리는 비 오는 저녁이면 특히 어김이 없다. 아저씨는 비가 오는 날엔 꼭 약주를 걸치고 오신다.

* * *

요 며칠은 날이 정말 추웠다. 운동을 나가는 저녁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엘 내려오는데 웬걸, 고양이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하얀 바탕에 노란 얼룩이 있는, 눈이 통통한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아이였다. 이때껏 아파트 안으론 절대 안 들어왔는데, 날이 너무 추운 때문인 듯했다. 입구 밖으로 나와서까지 따라오자, 나는 쪼그려 앉아 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뇨옹~? 끝을 살짝 올린 인사의 음파가 허공으로 채 다 흩어지기도 전에 고양이는 내 무릎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는 생애 처음이었다. 줄줄이 고양이 얘기만 써 놓고 나서 할 말이라기엔 스스로 겸연쩍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강아지파'에 가까웠다. 고양이는 보는 데 만족할 뿐, 평생 친해질 수는 없는 동물이라 생각했다. 고양이만 보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르는 고양이파 친구나 지인들은 내겐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잘 모르겠다 싶은. 그랬는데, 그랬는데!

녀석과의 대면으로 나도 그들의 세계에 입성하고야 말았다. 냥이는 쪼그린 내 다리 사이를 오가며 몸을 부비기 시작했다. 나는 꽤 용기를 내어(개를 만져본 적이야 많았지만 고양이는 정말로 처음이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적당한 부드러움을 가진 기분 좋은 감촉이 전해졌다. 얼마간 매만졌을까. 살짝 손등을 솟아올린 덜 편 손바닥에 고양이가 대뜸 한 쪽 뺨을 비벼오기 시작했다. 감은 눈에 가깝도록 완전히 굽어진 눈으로, 냥이는 내 낮은 손바닥과 쭈그린 발등에 연신 뺨을 비볐다. 발등에 뺨을 댈 땐 몸까지 반쯤 뒤집기 시작했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의 사랑스러움이었다. 1층에 다 들릴까 봐 목소리를 죽이고 갸악갸악 쉰바람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간질여줬다. 고양이파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 날들을 돌이켰다. 현명했도다, 용사들이여.

냥이는 해질녘에야 아파트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엔 볕이라도 쬐러 다니는 걸까. 저녁 운동하러 오갈 때마다 냥이는 반갑게 다가온다. 두리번거리면 어디선가 휙 튀어나와 이내 몸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나는 알아들을지 말지 알 수도 없는 인간의 인사를 건넨다. 아저씨께서 밥 주셨어? 오늘은 많이 춥지? 냥이는 대답이라도 하듯 발등에 뺨을 갖다댄다. 그러다 어제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손가락을 핥던 고양이가 아주 살짝,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였다. 아기고양이가 아닌 이상 이런 습성을 가진 건 사람이 키운 고양이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스치듯 들은 후 기억 어느 언저리에 처박아뒀던 말도 떠올랐다.

사람 안 무서워하는 길고양이는 사람이 버린 고양이가 대부분이래.

등을 쓰다듬던 손이 무거워졌다. 나의 공연한 정으로 이 아이에겐 또 무정한 기대가 쌓이는 게 아닌지. 나야 잠깐의 손길로 삶이란 언덕에 한 움큼의 정을 얹는 것뿐이지만, 이 생명체에겐 언덕 전체가 진동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고양이에게도 엄청난 의미라 했는데. 문득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단짝인 까망노랑얼룩냥이가 빳빳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띄우고 가만히 이쪽을 보다, 친구를 걱정스레 부르듯 야옹야옹 몇 마디 하고선 자기 터전으로 숨어버렸다. 녀석은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하얀냥이는 확실히 사람의 흔적이 있다. 마음의 무게가 보태진 손길이 더욱 느려졌다. 이미 사람에게 상처받은 동물이다. 어쩌면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책임지지도 못할 애정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천둥벌거숭이마냥 나 좋은 것만 알던 천진한 땅에 싹처럼 돋아올랐다. 나의 정이 맹목적이고 이기적이었구나. 속시끄러운 손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줄곧 곁을 지켰다. 목구멍까지 무거운 것이 차올랐다.

찬 바람에 30분이나 머물렀을까. 땀이 식어 몸이 떨렸다. 냥이에게 몇 번이나 작별 인사를 했다. 아이가 계속 따라왔다. 입구까지 들일 순 없어 두꺼운 유리문을 조심스레 닫으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퍼런 간유리에 바짝 얼굴을 댄 고양이가 작고 조심스러운 소리로 몇 번 울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고양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날이 너무 추웠다.

* * *

길고양이는 겨울의 냉기를 고스란히 견디며 산다.

오늘은 일부러 운동을 가지 않았다. 문에 얼굴을 바짝 대던 고양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함께 퇴근하신 부모님께선 집에 오시자마자 아랫층 아저씨 이야기를 하셨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모양이었다. 아저씨께서 손에 무언가 작은 걸 잡고 꼼지락거리시는 걸 아빠께서 보셨다고. 그게 뭐냐고 물으셨단다. 아빠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이사 오고 처음 들었단 말씀을 덧붙이면서, 대답을 전했다. 애들 중에 이가 안 좋은 애가 있어서 손수 뽑아줬다고. "고양이 이빨 안 좋은 것도 아십니까?" "8년간 밥 주다보니 그 정돈 다 압니다."

이리저리 떠돌던 연민의 조각들이 다복다복 쌓이는 느낌이었다. 언어라는 의사소통의 기반이 철저히 배제된 존재, 때론 눈총을 받기도 하는 오갈 데 없는 생명체에게 8년이란 시간을 한결같이 쏟아온 애정. 그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걸까. 아저씨가 베푸는 사랑의 중력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은근한 조심스러움으로 담아낸 아저씨의 애정에는 뭉근하고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사랑이 가장 힘이 셀 때는 열렬할 때가 아니라 꾸준할 때이리라. 모든 사랑엔 조심스럽고도 너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생각난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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