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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화원/일상

어떤 익숙함

by 디어샬럿 2017. 1. 8.

 

O가 결혼했다.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만났다...는 말을 쓰려니 좀 게적지근하다. 일면식 정도일 뿐 친분이 있었다곤 말하기 힘든 사이들이니. 나와는 별 관계가 없었던 O의 친구들을, 그저 내 쪽에서 열심히 관찰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하겠다. 그 작업은 마치 전반적인 생경함 사이에서 익숙함을 솎아내는 과정 같았다. 한 눈에 봐도 12년 전이 그려지는 얼굴이 점점이 존재했지만, 대개는 이젠 영 못 알아볼 서른 언저리의 누군가들이었다. 그만치 설익은 인연이라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대도 감흥도 없을 터였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대충 우리 또래려니 생각하고 스쳐갈 타인들. 아니, 그런 찰나나 주어질는지. 주어진대도 관심이나 기울일는지. '너무'래도 좋으리만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인연이라기에도 민망한 그 정도의 인상들엔 눈길조차도 제대로 가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선가 이젠 다들 진짜 모르겠다야. 나는 점심을 먹으며 가까운 친구 몇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게 오늘 집에 가서 고등학교 졸업사진이나 좀 볼까보다. 졸업사진은 말도 하지 마라 얘, 그 사진 봐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 같지도 않게 나온 사진들이었잖아.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소녀처럼 웃었다. 그 순간조차도 이름도 모를 그녀들은 망막에 맺힌 피사체 너머로 희뿌연 배경이 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는 가끔 시선으로 그녀들을 좇으며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비친 나는 어느 쪽일까. 기억에라도 남아있다면 기적일 인연 쪽이 아닐까 싶다. 쟨 똑같다 아니 쟤 못 알아보겠다 그런 말조차도 사치스러울. 새삼, 깨닫지 못하는 새에 점차로 좁아진 인간관계의 면적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젠 마음에 박히지 않는 사람을 위해 시간 한 쪽을 오려내는 것도 마뜩잖아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무섭고도 위대한 일이다. 알아가는 것에만도 적잖은 시간이 드는 법. 누군가에 무언가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대체 얼마만큼 시간의 켜가 쌓여야 하는지. 오랜 친구들, 익은 지인들을 만나는 요즈음 부쩍 그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시간을 느낀다. 때론 작은 떨림이 와 어느 구석이 바스라져도 언제든 다시 쌓아올릴 수 있는 두터운 마음의 윤곽들 말이다. 격려와 비밀과 위로와 진심이 쌓아올린 무심한 정성들이랄까. 이따금 조금 뭉클해진다. 아주 간결한 언어와 미세한 눈빛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주고받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지나온 것일까. 완벽한 타인들이 만나 서로에게 알맞은 온도로 맞춰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의 구름들을 통과해야 했을까. 시간은 사람과 관계를 빚어낸다. 인연은 시간과 애정을 먹고 자란다. 충분한 나날을 견디지 못한 인연은 그래서 한없이 나약한 건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우리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걸 해 왔구나 싶다.

돌아오는 길에 그 버스를 탔다. 나는 예전부터 그 버스를 좋아했다. 이맘때보다 조금 더 전이었던 어느 무렵, 그 버스가 이끄는 길로 매일 집엘 갔다. 조금 놀랐다. 꽤 익숙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어색했다. 가로등과 간판 불빛이 위태롭게 비추던 거뭇한 도시를 기억하고 있었던 탓인가. 능선을 넘었음에도 건재한 볕이 건조하게 훑어낸 거리는 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어드메어드메입니다, 익숙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도시가 이어졌다. 어둠을 벗은 민낯의 길은 이랬구나. 내 시선의 생니들이 낯익게 낯선 풍경을 되새김질했다. 이 길에 이 건물이 있었던가- 마른 눈으로 하나하나 짚어갈 때쯤, 그 언저리를 보았다. 까만 밤에 보던 고개인데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울퉁불퉁한 공간을 오간 다붓한 말들을 생각했다. 살짝 고개를 낮춘 웃음과 가지런한 눈. 의식의 수면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어느 얼굴.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해지지만, 때론 그로 인해 잠 못 이루게 하는 것들을 끌어안게도 되지. 오늘 같은 새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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