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피천득 작가는 인연을 이른 적이 있다. 사람 사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경험, 장소, 심지어는 문장 몇 줄에까지도 '아니 만나는' 편이 어쩌면 더 좋았을 연이란 게 있다. 안타깝게도 <파수꾼>이, 내게는 그런 소설이 돼 버렸다.
열여덟 즈음이었나. <앵무새 죽이기>를 처음 읽었다. 쉴 틈도 없이 한 권을 내리 달렸다. 전율이랄까 충격이랄까. 이런 책이 다 있구나 싶었다. 간단히 이르자면, 60년대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을 6살배기 루이즈 진 핀치의 짓궂지만 더없이 순수한 눈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너무 무겁지 않고도, 외려 그렇기에 흑백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비춰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백인 동네의 멸시를 이겨내고 자신만의 정의를 지켜가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고뇌와 강단이 빛나기도 했다. 애티커스의 조용하지만 힘 있는 마지막 변론씬은 단연 이 책의 명장면. 하퍼 리는 이 작품으로 단번에 미국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녀의 후속작은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을 남긴 - 물론 자의라고 보긴 힘들지만 - 마거릿 미첼을 닮은 행보라 더욱 주목받았던 터.
후속작은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에 나왔다. 작가가 오래간 개인금고에 숨겨왔다던 <파수꾼>은 작년 가을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은 나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니면 내가 이 소설과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0년의 시간은 도대체 무엇을 할퀴고 간 것일까. 젬은 청춘을 누리지도 못한 채 이승을 등졌고, 캘퍼니아 아줌마는 핀치네를 떠났다. 게다가 완고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버린 애티커스 핀치는 대관절, 백번 양보해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이 작품은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 출간 전, 즉 작가지망생의 '습작'과도 같은 개념으로 썼던 미완품이었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이 작품의 출간을 완강히 반대했단다. 필자가 허락하지 않은 책을 낸 이유, 누구도 말하지 않아도 눈에 선한 그 사실. 그 오점이 <앵무새 죽이기>에까지 튀어버린 이 기분을 뭐라 말해얄까. 이다지도 씁쓸한 핀치 가문의 20년 후라니. 소설 속의 모든 것이 개연성을 잃은 채 허공에 떠다닌다. 말도 못할 허무함과 그로 인한 분노란. 이쯤 되면 충격이 아니라 농락이래도 할 말은 없을 지경이다.
무엇보다 애티커스 핀치는 내 종이이상형이었단 말이다! 이렇게 세월에 난도질 당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진 않았다. 아름다우니 남겨둘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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